영국계 글로벌은행 HSBC는 올 들어 주가가 반토막 났다. 홍콩증시에선 50.3%, 영국 런던증시에선 48% 하락했다. 날아간 시가총액은 800억달러(약 93조5500억원) 규모다. 금융업 약세 탓만이 아니다. 지난 6개월간 JP모간, 씨티은행 등 라이벌 은행의 주가는 1~3% 오른 반면 HSBC는 45.9%(홍콩증시 기준) 빠졌다.

HSBC 주가 폭락에 대해 전문가들은 “홍콩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갈등 사이에 줄타기를 하다가 둘 다 놓쳤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중국과 미국 당국의 제재를 각각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팔자’에 나섰다는 것이다.
HSBC, 美·中 사이 아슬아슬 줄타기…결과는 시총 반토막

美·中 “HSBC, 누구 편인지 선택하라”

중국의 홍콩보안법 시행을 앞둔 지난 5월 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HSBC가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고 보도했다. HSBC가 홍콩보안법에 대한 찬성 입장을 내놓지 않자 구두 경고를 한 것이다. 당시 중국 최고자문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렁춘잉 부의장은 “HSBC가 서방 각국의 방침을 따르겠다면 중국에서 돈을 벌어가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일”이라고 엄포를 놨다.

HSBC가 홍콩보안법 지지를 공식 표명한 뒤 문제는 더 꼬였다. 환구시보는 자국 인사들을 인용해 “HSBC의 입장이 너무 늦게 나왔다”며 “앞으로 구체적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평론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HSBC가 미국 제재 명단에 오른 이들에게 계속 금융서비스를 하고 있다”며 HSBC가 중국 당국의 홍콩 탄압을 방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6월엔 “HSBC가 중국에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거리는데, 이렇게 비굴한 일을 해봤자 중국 정부의 존중을 받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례적인 맹비난을 쏟아냈다.

환구시보는 지난 19일 또다시 “HSBC가 중국 정부가 작성하는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명단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튿날엔 미국의 금융제재 대상과 불법 자금거래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HSBC 주가는 25년 만에 최저치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중국·서방 ‘반반 회사’…딜레마 계속

HSBC가 유독 미·중 갈등 소용돌이를 크게 겪는 데엔 이유가 있다. 중국·홍콩과 미국·영국의 영향력이 거의 반씩 뒤섞여 있어서다. HSBC의 원래 이름은 홍콩상하이은행이다. 1866년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에서 영국 상인들을 위해 출범했다. 1993년엔 홍콩 반환을 앞두고 런던으로 본사를 옮겼다.

주요 매출처도 중국·홍콩과 미국·영국으로 나뉜다. 지난해 실적 기준 홍콩과 중국 비중이 40.7%, 영국과 미국이 33%를 차지한다. 주요 주주 구성도 중국·홍콩계와 미국·영국계가 거의 양분하고 있다. 최근엔 중국이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중국핑안보험그룹은 지난 28일 HSBC은행 1080만 주를 3억홍콩달러(약 452억원)에 추가 매입해 8% 지분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2대 주주인 미국 블랙록은 7%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 때문에 HSBC의 ‘미·중 딜레마’는 장기화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씨티그룹은 20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중국 당국은 강력한 조치 없이도 HSBC의 거래처를 은근히 압박해 ‘불필요한 거래’를 끊게 할 수 있다”며 “최악의 경우 중국 본토에서 아예 사업을 고사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중국 편에 서기도 어렵다. 미 달러화 거래 의존도가 높아 미국이 불법 자금거래를 빌미로 제재 카드를 꺼내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제프리 핼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ANDA) 수석애널리스트는 “HSBC가 미국에 ‘미운털’이 박히면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체계에서 퇴출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중국에서 사업 기회를 늘려도 별 의미가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