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에서 가장 견고하던 유리천장이 산산조각났다.’

미국 3위 은행 씨티그룹이 10일(현지시간) 여성인 제인 프레이저 글로벌소비자금융 사장을 차기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자 월가는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고 반응했다. 미 대형은행이 여성을 CEO로 택한 것은 이번이 사상 최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적인 미 대형은행의 CEO 자리는 월가의 여성들에게 가장 깨기 힘든 유리천장으로 여겨져왔다.

마이클 코뱃 현 CEO에 이어 내년 2월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프레이저는 강인하고 전략적인 리더십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거튼칼리지를 졸업하고 골드만삭스와 맥킨지를 거쳐 씨티그룹에 2004년 입사했다. 16년 동안 재직하는 동안 프레이저는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씨티그룹이 역경에 처한 순간 또다시 중책을 맡게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씨티그룹이 미 정부로부터 대규모 구제금융을 받았을 당시 전략 담당이었던 프레이저는 자산관리 및 보험판매 등 사업부인 스미스바니 매각 등을 이끌며 회사 체질개선을 주도했다. 2013년에는 모기지 금융을 재편했다. 2015년에는 회계부정 스캔들에 휘말린 중남미 사업부의 실적을 개선하는데 성공했다. 존 거스파 전 씨티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제인은 터프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태생인 그가 ‘진정한’ 미 월가의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의구심에 정면대응하기 위해 그가 타운홀미팅에서 “정신과 마음, 인내심과 시간을 쏟아부어 ‘올인’하면 된다”고 일갈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월가의 여성 최고참 임원 중 하나인 프레이저는 평소 여성들에게 “자신의 강점을 드러내는 데 수줍어하지 마라”고 충고해왔다.

그는 지난해 글로벌 소비자금융 담당 사장으로 승진해 차기 CEO 후보로 떠올랐으며, 코뱃 CEO가 애초 예상보다 1년 빨리 퇴임하면서 조기에 자리를 물려받게 됐다.

프레이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씨티그룹을 이끌게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씨티그룹은 수년 동안 수익성과 주가 등에서 경쟁사보다 부진한 실적을 내 왔다. 전임인 코뱃 CEO의 재임기간 동안 씨티그룹의 주가상승률은 43%로 S&P500 금융지수 상승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세계 최대 신용카드 발행사인 씨티그룹은 코로나19로 고객들의 대규모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쟁사 대비 취약한 일반 개인 대상 소비자금융 부문을 강화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한편 여성 고위임원들을 둔 JP모간체이스 등 다른 대형은행에서 조만간 여성 CEO을 배출할지 관심이 쏠린다. 지금까지는 미 20위권 은행인 키코프 정도에서만 여성 CEO가 등장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