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유럽 천연가스 시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천연가스관 건설 사업에 투자하는 기업을 제재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러시아의 천연가스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견제하고 나섰다.

美 “러시아 가스관 돕는 기업 제재”

美 "러-獨 천연가스관 참여기업 제재할 것"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15일(현지시간) “미국은 러시아 가스관 사업을 지원하거나 투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중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노드스트림2’와 ‘투르크스트림’ 천연가스관 프로젝트를 경고 대상으로 지목했다. 둘 다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기업 가즈프롬이 주도하고 있다. 노드스트림2는 러시아 가스를 발트해 해저를 거쳐 독일 등 서유럽에 보내는 1230㎞ 길이의 가스관이다. 투르크스트림은 러시아에서 터키를 지나 남동부 유럽까지 약 930㎞ 이어진다.

美 "러-獨 천연가스관 참여기업 제재할 것"
러시아는 2015년 노드스트림2 사업을 시작했다. 당초 작년 말 가스관을 개통할 예정이었으나 완공까지 약 160㎞를 앞두고 완공률 93%에서 사업이 돌연 중단됐다. 미국의 제재 움직임에 스위스 민간기업 올시즈가 공사를 멈추고 철수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2017년 만든 적대세력 대응제재법(CAATSA)을 수정하고 있다고도 했다. 법 제정 당시에는 과거에 노드스트림2 등에 투자한 기업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으나 이 같은 예외를 없앨 방침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2015년 노드스트림 사업 출범 때 투자한 로열더치셸, 우니퍼, 뷘터살 등 유럽 에너지 대기업이 제재 명단에 오를 수 있다. 독일 기업협회는 “미국이 제재에 나서면 유럽 12개국 120개 기업이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러 “EU 천연가스 시장 잡아라”

미국이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프로젝트에 대해 전방위 압박에 나선 것은 유럽 내 러시아의 입김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EU는 연간 천연가스 소비량의 3분의 1 이상을 러시아에서 들여오고 있다. EU 27개국 중 14개국이 천연가스 수요의 50%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한다. 러시아는 이를 역내 영향력 확대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유럽과 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네 차례에 걸쳐 유럽행 가스관을 잠그는 식으로 ‘실력 행사’를 하기도 했다.

노드스트림2와 투르크스트림이 모두 가동되면 러시아는 EU 가스 수요의 절반가량을 공급할 수 있다. 이에 맞서 미국은 이스라엘 해안에서 키프로스섬을 거쳐 그리스까지 이어지는 이스트메드 가스관 건설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스트메드 가스관은 완공 뒤 천연가스를 연간 120억㎥가량 수송할 수 있다. EU 수요의 10% 규모다.

미국의 압박은 자국 천연가스를 유럽에 판매하려는 ‘실속 챙기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위협은 유럽에 천연가스 판매를 늘리려는 열망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다.

관세 전쟁 가능성도 부상

일각에선 유럽 천연가스관 경쟁이 각국 간 정치·경제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드스트림2 프로젝트와 관련해 “독일은 에너지를 얻겠다고 러시아에 수십억달러를 쓰는데, 미국이 왜 독일을 지켜줘야 하느냐”며 독일 주둔 미군을 감축하겠다고 위협했다.

독일 정부는 미국의 노드스트림2 사업 제재를 심각한 내정 간섭으로 보고 있다. 독일은 이달 초 “미국이 추가 제재를 현실화할 경우 EU와 연합해 보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독일은 에너지 공급망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며 “갈등이 심해지면 미국산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 등을 검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