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핏줄끼리 공존공영해야 하지만 전쟁 교훈 잊지 말아야"
[6.25전쟁 70년] 구순의 참전용사 황병태 옹 "다시는 없어야죠"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지요.

"
올해 91세인 황병태(대구시 동구)옹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됐다는 말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1929년 10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황 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만 23살에 다소 늦은 나이로 공군에 입대했다.

경남 진주에 살던 황 옹은 징집 명령이 내려오자 주저 없이 나라의 부름에 응했다고 말했다.

대구에 있는 공군 기지에 배속된 황 옹은 간단한 기본 훈련을 받고 곧장 작전에 투입됐다.

주된 임무는 출격하는 아군 전투기를 무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 주력 비행기인 F-80, F-86 세이버 전투기는 물론 대한민국 공군 최초 전투기인 F-51 등에 기관총을 달고 실탄을 장전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로켓포를 장착하는 일도 빠지지 않았다.

공습이 잦은 날에는 불과 몇 분 간격으로 전투기가 이륙해 온종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공습이 뜸한 날에는 항공기 정비까지 맡아 구슬땀을 흘렸다.

[6.25전쟁 70년] 구순의 참전용사 황병태 옹 "다시는 없어야죠"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직접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나라를 구하는 일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힘들 때면 자신보다 조금 앞서 육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 고향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버텼다.

8개월가량 혼신을 다한 끝에 전쟁이 멈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8년을 더 공군에 몸담고 있다가 1961년 제대한 뒤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새 인생을 설계하려고 했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친구를 따라 화신백화점 7층 영화관을 드나들며 사업 구상을 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군에서 전투기 무장과 정비 등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왔다.

공군 측은 황 옹이 수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에 있던 가족을 먼저 대구로 데려가야 할 만큼 사정이 절실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기 짝이 없지만 당시 공군은 대구기지(K-2)에 대규모 시설을 만들면서 전투기 정비·무장 분야 베테랑이던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또한 나라의 부름이라고 생각한 황 옹은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군무원으로 23년을 근무하고 1985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 15년간 6.25참전유공자회 대구 동구지회장을 맡다가 2017년부터 대구시 지부장으로 참전 용사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6.25전쟁 70년] 구순의 참전용사 황병태 옹 "다시는 없어야죠"

그는 2008년 국가유공자법 제정 당시 국회의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법 통과를 위해 애쓴 일에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유공자 한 사람당 참전수당 33만원을 매달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참전수당 외에 각 자치단체가 주는 명예수당이 제각각인 점은 불만이다.

황 옹이 사는 대구에서는 참전용사가 매달 8만원씩 받지만 20만∼30만원대 수당을 주는 지역도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금전 욕심보다 대구에 참전 유공자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현재 대구에 생존하는 6.25 참전유공자는 3천500명 안팎이다.

고령인 탓에 해마다 300∼400명이 세상을 등져 10년 후엔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몸소 겪은 6.25 전쟁 참상을 증언할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 전후 세대가 확고한 안보관을 정립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고도 했다.

황 옹은 "같은 핏줄끼리 더는 싸우지 말고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70년 전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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