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에안, 하띤성 인구 합쳐 500만명 육박
척박한 환경에서 인재 쏟아져
정재계 거물들 응에띤 출신들 다수
하띤 파라다이스 전경. 한창 건설 중인 리조트 단지 너머로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하띤 파라다이스 전경. 한창 건설 중인 리조트 단지 너머로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서편 라오스 고원을 타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열풍에 작물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메마른 땅을 견뎌내는 건 땅콩뿐이었다. 사람들의 삶도 척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땅 위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부평초처럼 떠돌아야했다. 뿌맛(Pù Mát) 고원의 소수 민족 단라이(Dan Lai)족은 앉은 채로 자는 습관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엄혹한 환경이 베푼 은혜는 딱 한가지였다. 오직 뜨거운 불만이 강철을 만들어내듯이 이 땅 위의 사람들은 불굴의 의지와 강인함을 DNA에 오롯이 새겼다. 베트남 중부 ‘응에띤(Nghệ Tĩnh)’에 관한 얘기다.

베트남 사람들은 응에안(Nghệ An)성(省)과 하띤(Hà Tĩnh)성을 합쳐 응에띤이라 부른다. 베트남 중부 지방 특유의 기질을 간직한 이곳의 주민들은 북부, 남부와는 사용하는 말투도 확연히 다르다. 두 성의 인구를 합치면 약 500만 명에 달한다. 호찌민과 하노이를 제외하면 가장 인구가 많다. 응에띤 지역은 베트남 정치사(史)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베트남 독립운동의 아버지인 호찌민이 응에안의 호앙쭈(Hoàng Trù)에서 가난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응에안성은 호찌민 생가(生家)와 마을을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복원해 일반에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생가 주변을 논밭이 둘러싸고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이다. ‘보기 좋게 과실수나 정원수를 심지 말고, 민가의 논밭은 그대로 두라’는 호찌민의 생전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응에안성의 성도인 빈(Vinh) 시내 유명 해산물 식당

응에안성의 성도인 빈(Vinh) 시내 유명 해산물 식당

응에띤 소비에트(soviet)는 베트남 공산주의의 시원으로 평가 받는다. 1930~1931년 응에안, 하띤, 꽝응아이(Quảng Ngãi) 등 세 개 성(省)에서 일어난 대중 봉기를 통해 베트남은 반식민주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프랑스 식민기구의 과중한 세금과 약탈에 분노한 이들이 일시적이나마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프랑스는 공군력을 동원해 폭탄 투하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1930년 2월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호찌민 등은 응에띤의 대중 운동에 고무돼 베트남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응에띤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전쟁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수백 년 이곳을 제집으로 알았던 참파 왕국은 베트남 킨(Kinh)족의 침탈을 못 견디고 남쪽으로 쫓겨났다. 베트남의 지배도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그들의 세력권을 베트남 중부에까지 뻗치려 혈안이었다. 베트남의 민족영웅인 꽝쭝 황제는 1788년 응에띤 병사 9만명을 이끌고 북부로 진격해 청(靑)을 몰아내고 탕롱(현 하노이)을 회복했다. 중국으로부터 짧은 독립 뒤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50년대 초에 베트남 공산당이 응에띤을 ‘해방’시켰으나 이는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공산당의 지배를 거부한 이들은 서둘러 사이공으로 탈출했는데 이때 이산(離散)의 아픔을 겪은 가족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응에띤은 ‘아메리칸 워(American War)’로 인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낭 공군기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중부 해안가에 해병대를 상륙시키며 베트남 내전에 개입한 미군은 다낭 북부에 있는 후에, 꽝빈, 응에띤 등을 차지하기 위해 2차 세계 대전 때보다 많은 폭탄을 이 땅에 떨어뜨렸다. 응에안의 성도인 빈(Vinh)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오늘날의 빈은 왕복 8차선의 메인 도로를 갖춘 계획도시로 재탄생했지만,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비 오는 날 방문한 호찌민 생가

비 오는 날 방문한 호찌민 생가

베트남에서 차지하는 정치적인 위상 덕분에 응에띤은 수많은 고위급 인사들을 배출했다. 현 투자계획부(MPI) 장관, 환경부 장관도 응에띤 출신이다. 척박한 땅에서 삶을 개척한 응에띤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인재들이 많이 나왔고, 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호찌민 주석의 부친은 가난한 유학자였지만, 아들의 교육엔 헌신적이었다. 베트남의 또 다른 민족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판딘풍(Phan Đình Phùn)은 하띤 출신으로 1877년 황실 과거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소년 황제 함응이를 추대하려는 껀브엉 운동을 일으켜 반란군을 이끌었다.

워낙 거친 환경에서 자라난 터라 응에띤 사람들은 검약이 몸에 배어 있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응에띤 출신에 ‘까고(Cá Gỗ)’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나무 물고기라는 뜻이다.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나무를 피시 소스에 찍어서 핥아 먹는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국판 자린 고비와 비슷하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재계 주요 인물들이 응에띤에서 나왔다. 베트남 재계 1위인 빈그룹의 팜 녓 브엉 회장은 하띤 출신이다. 그 역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러시아 유학생으로 뽑혀 해외에서 기업가 정신을 길렀다. 베트남 부동산 재벌이자 60여 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무옹 탄( Mường Thanh) 그룹의 레 탄 탕(Le Thanh Than) 회장은 응에안이 고향이다. 베트남계 호주 기업인인 응우옌 응옥 미(Nguyễn Ngọc Mỹ) 바비스(Vabis)그룹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하띤 출신의 기업인이다.
응에안에 조성된 VSIP 산업단지 내 조감도

응에안에 조성된 VSIP 산업단지 내 조감도

베트남 현대사를 관통하는 미 회장의 이력은 오늘날의 베트남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짚어볼 만하다. 1950년생인 그는 성공한 ‘보트 피플(boat people)’ 기업인의 대명사다. 27살의 나이에 4명의 자식과 처를 데리고 작은 보트에 몸을 맡긴 채 사이공을 탈출했던 무명의 베트남인은 1992년 성공한 건설업체 사장이자 호주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10층 이상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사이공에 17층짜리 빌딩을 비롯해 처음으로 고층 건물을 사이공 스카이라인에 포함시킨 이가 미 회장이다.

하띤의 유력 가문이었던 미 회장 일가는 응에띤 일대가 공산화되면서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미 회장은 1954년에 사이공으로 탈출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에 가난한 청년은 미 해병대 기지에서 목수 일을 했다. 종전 후 그 일은 그에게 부역자라는 딱지를 안겼다. 약 1년 간 교화 시설에 들어가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다.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미 회장은 1978년 전 가족을 데리고 낡은 배에 몸을 실었다. 해류를 따라 구사일생으로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말레이시아였다. 이곳에 잠시 체류한 뒤 호주 시드니에서 철강 노동자로 새 삶을 시작했다.

고희를 넘겼는데도 그는 여전히 형형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깡마른 체형에 약간 구부정한 어깨, 뒤로 쓸어 넘긴 반백의 장발을 한 채 그는 지금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인 하띤에서 대규모 리조트 사업을 진행 중이다. 1.6km에 달하는 드넓은 백사장이 인상적인 하띤의 바다 옆에 ‘파라다이스 하띤’이라는 리조트 단지와 골프장을 만들었다. 올해 말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완공되면 약 1500실의 대규모 위락 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그만의 ‘천국’에서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사업의 최우선 목표는 베트남을 위해서다.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뿐이다”

그의 도전 정신은 응에띤 특유의 강인한 DNA 덕분인 지도 모른다.
작은 보트 위, 목숨을 걸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망망대해를 건넌 그는 강철로 단련됐다. 1년을 철강소 노동자로 근무한 미 회장은 1981년 15명의 직원을 데리고 작은 건설 회사를 차렸다. 1980년대의 호주는 과감한 경제 개혁으로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인력이 필요했고, 특히 건설업과 같은 고된 노동이 필요한 분야엔 베트남계 이민자만큼 적합한 이들도 드물었다. 미 회장의 회사는 3년만에 직원 150명의 회사로 성장했다. 1992년 호주 사절단의 일원으로 베트남 땅을 다시 밟은 미 회장은 호찌민 등 남부에선 베트남 제1의 건설 전문가로 활약했다. 북부 하노이에 김우중의 대우가 있었다면, 남부엔 미 회장이 지배하고 있던 셈이다. 호찌민에서 남쪽으로 1시간쯤 차로 가면 나오는 해안 도시 붕따우에 베트남 최초로 그레이하운드 경견장을 만든 것도 미 회장이다.

미 회장 같은 보트 피플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어엿한 기업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베트남 사회의 개방성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베트남 정부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2016년에 총리령으로 ‘프로젝트 844’를 발표했는데 이를 총괄하기 위한 외부 전문가로 호주계 베트남 여성인 응우옌 피 반(Nguyen Phi Van)을 영입했다. 베트남의 유력 스타트업 창업자 중엔 공산주의를 혐오해 프랑스로 망명했던 베트남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상당히 많다. 베트남 남부에 기반을 둔 기업들 중에선 보트 피플의 후손인 베트남계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지분을 보유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정,재계의 걸출한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했지만 정작 응에띤은 다른 성에 비해 경제적으로 발전이 더뎠다.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이들은 하노이나 호찌민으로 나갔다. 하지만 요즘의 응에띤은 베트남에서 가장 발전 잠재력이 큰 곳으로 꼽힌다. 빈(Vinh) 외곽엔 싱가포르계 산업단지 전문업체인 VSIP가 대규모 단지를 조성했다. 응에띤은 한국으로 노동 인력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일 정도로 노동력이 풍부하다.

베트남의 깊은 속살을 원시 그대로 간직한 천연 자원은 응에띤만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이다. 뿌맛 국립공원, 께고 자연보호 구역을 갖고 있고,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꽝빈성의 퐁냐께방 국립공원 등과도 가깝다. 대처로 떠났던 응에띤 출신의 기업인들이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고향에 집중 투자하면서 응에띤의 발전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무옹 탄 그룹은 올 초 응에안에 무옹 탄 골프클럽을 개장한데 이어 미 회장이 건설한 하띤 파라다이스 골프클럽도 최근 인수해 무옹 탄 골프클럽으로 이름을 바꿨다. 빈 시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해안가 빈 골프클럽도 무옹 탄의 품에 안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응에띤이 보유한 3개의 골프클럽은 저마다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응에안의 무옹탄CC는 숲으로 둘러싸인 산중에 자리 잡고 있다. 유원지와 사파리, 호텔까지 같은 단지 안에 있어서 가족 휴양 시설로 좋다. 하띤에 있는 무옹탄CC는 링크스 코스의 매력을 한껏 살렸다. 빈CC도 해안가 바로 옆에 있지만, 스타일은 정 반대다. 가장 오래된 코스답게 방풍을 위해 심어 둔 키 큰 나무들이 홀을 구분하고 있어서 전형적인 미국 골프장을 떠올리게 한다. 3개 골프클럽을 모두 섭렵해도 가격은 다낭 등 잘 알려진 관광지의 반값이다. 게다가 응에띤의 바닷가는 베트남에서 해산물이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본 기획물은 언론 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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