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영국 사회에 만연한 뿌리깊은 인종차별
코로나19 이후엔 한국인 등 아시아인 주요 타깃
무성의 일관하는 英 경찰…인종차별 외면하는 정치인
3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주영 미국대사관 앞에서 수천명의 시위대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EPA

3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주영 미국대사관 앞에서 수천명의 시위대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EPA

3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템스강변 남쪽 베터시 인근에 있는 주영 미국대사관. 각종 팻말을 든 수천명의 시민들이 대사관 앞에서 ‘인종차별 반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지난 25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제압으로 숨진 비극적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항의시위였다.

인근 주택에 사는 시민들도 시위대의 가두시위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높여 응원했다. 인근 도로를 지나가던 차량들도 연신 클락션을 울리는 등 힘을 보탰다. 이날 런던 도심 트라팔가광장에서 모인 수천명의 시위대는 템스강변을 따라 미국대사관까지 행진하며 ‘숨쉴 수 없다’(I can't breathe)는 구호를 연신 외쳤다.

플로이드가 수갑을 차고 길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백인 경찰 무릎에 9분간 눌려 숨져가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눈물을 흘리며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고 외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시위에 참여한 백인들도 적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이날 런던뿐 아니라 잉글랜드 맨체스터, 웨일즈 카디프 등에서도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고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봉쇄조치가 일부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된 이날 시위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철저히 준수하면서 진행됐다. 런던 경찰은 이날 시위과정에서 코로나19 관련 봉쇄조치를 위반한 3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영국에서도 흑인과 아시아인 등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다. 영국 정부가 2017년 공식 발간한 ‘인종차별 보고서’에 따르면 흑인이 경찰 불심검문을 받는 비율이 백인보다 세 배나 높았다. 불심검문을 통해 체포된 비율도 흑인이 백인보다 절반 가까이 높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 등에서도 유색인종을 향한 인종차별을 지금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숨쉴 수 없다"…英까지 확산된 인종차별 항의시위

영국 정치인들도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올 초엔 보리스 존슨 총리의 보좌관이 과거 자신의 블로그에 ‘흑인은 평균적으로 지능이 낮다’는 등의 인종차별 발언을 올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사퇴하기도 했다. ‘영국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는 존슨 총리도 과거 흑인과 이슬람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올 초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이후엔 아시아인들을 향한 혐오 인종차별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길거리에서 한국인 등 아시아인를 향해 욕설을 퍼붓거나 폭행을 가하는 등의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쓴 아시아인들을 향한 인종차별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영국 주요 정치인들은 코로나19 관련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해선 공식석상에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잇단 인종차별 사건에도 영국 경찰은 성의없는 조사로 일관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때문에 주영 한국대사관은 혐오 인종차별을 당했을 경우 가급적 불필요한 대응을 하지 말고 신속히 현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경찰에 신고해도 수시간 후에 출동하거나 때로는 다음날이 돼서야 연락이 오는 등 신속한 경찰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 대사관측의 설명이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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