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진 세계 3위 러시아, 2차대전 승전 기념행사 강행
붉은광장 군사퍼레이드 내달 개최…푸틴 집권연장 개헌투표 7월초 예정

러시아에서 5월은 자긍심과 애국심의 달이다.

세계 제국 건설의 망상을 펼치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상대로 한 2차 세계대전(대독전) 승전 기념일(5월 9일)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이 2차대전을 대하는 태도는 각별하다.

러시아는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조국전쟁’,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르며 민족적 자긍심의 근거로 삼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인뿐 아니라 온 국민이 하나가 돼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승리한 전쟁이란 의미다.

[특파원 시선] 크렘린, '대조국 전쟁' 승리 이끈 애국심 기대하나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를 제정러시아 군대와 민중이 힘을 합쳐 무찔렀듯, 세계 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강철 군대 역시 소련의 군인과 국민이 끝내 굴복시켰다는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는 용어다.

러시아가 두 번씩이나 세계를 정복자의 손아귀에서 구해 냈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소련 침공 10여 일 뒤인 1941년 7월 3일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이것은 보통 전쟁이 아니라 총력전, 전체 소련 인민의 전쟁이다.

소련의 자유냐, 독일 지배하의 예속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애국심에 호소했다.

솔직히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과 공헌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소련과 대결한 서방 진영에 속한 한국 국민은 흔히 2차대전을 미국·영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과 나치 독일군의 전쟁으로 이해한다.

독일군이 패한 것도 1944년 6월 미·영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2차대전은 사실상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0년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 등의 서유럽을 불과 한 달여 만에 점령하고 승승장구하던 나치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고, 근 4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굴복시킨 주역이 바로 소련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학자들은 많지 않다.

소련은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전(1941~44년),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43년), 쿠르스크 전투(1943년) 등의 대규모 전투들을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차례로 승리로 이끌면서 나치군을 서서히 패망의 길로 몰고 갔다.

제2전선 구축을 통해 독일군 전력을 분산시켜 달라는 스탈린의 여러 차례의 요청에도 동부전선(소련 전선)에 숨통을 틔워줄 서부전선(유럽 전선) 구축을 미루던 서방 연합군은 소련군이 승기를 잡고 나치군이 수세에 몰린 뒤에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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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승리의 주역이 소련이었다는 사실은 인명 피해 수치로도 드러난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쓴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 따르면 2차대전 기간에 희생된 소련인은 2천560만명으로 추산된다.

약 860만명의 군인과 이보다 훨씬 더 많은 1천700만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합친 것이다.

2차대전 전체 사망자는 6천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 40% 이상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군인들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물론 일반인들이 후방 유격대 활동, 적군의 보복, 강제 노역, 포격,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헤아릴 수 없이 숨졌다.

이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니 전쟁에 대한 기억이 비통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고, 승전 기념일이 가장 큰 국경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대조국 전쟁은 애국심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진다.

올해 승전 75주년을 맞아 러시아가 대대적으로 준비했던 군사 퍼레이드 등의 주요 기념행사는 전쟁에 버금가는 세계적 재앙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쩔 수 없이 연기돼 다음 달 24일 열릴 예정이다.

6월 24일은 1945년 2차대전 종전 직후 승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 게오르기 쥬코프 원수의 지휘로 붉은광장에서 첫 승전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진 날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세계 3위 규모(28일 현재 약 38만명)까지 증가하고 확산세가 완전히 꺾이지 않은 와중에도 승전 기념행사를 강행하기로 했다.

뒤이어 7월 초에는 4기 집권이 끝나는 2024년 이후 푸틴 대통령의 권력 연장 길을 열어 줄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치러질 예정이다.

대규모 승전 기념행사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인의 애국심을 달궈 추락하는 푸틴 대통령의 인기를 반등시키고 개헌 투표에서 높은 지지율을 끌어내려는 크렘린궁의 구상인지도 모르겠다.

[특파원 시선] 크렘린, '대조국 전쟁' 승리 이끈 애국심 기대하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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