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에 이어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경제 충격을 막기 위해 잇달아 대규모 양적완화에 나서고 있다.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찍어 시중의 국채·회사채를 사들이는 식으로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비(非)기축통화국이 양적완화에 나서는 건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전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조치다. 자국의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지만 통화가치 급락으로 신흥국발(發) 외환위기를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빚더미' 신흥국들까지 돈 찍어낸다…무디스 "국가 부도" 경고
‘극약처방’ 내놓은 신흥국

30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브라질 중앙은행은 지난 27일 1조2000억헤알(약 281조원) 규모의 양적완화 대책을 내놨다. 중앙은행이 시중에서 국채를 사들이는 단순 매입 방식이다. 호베르투 캄푸스 네투 브라질 중앙은행 총재는 “이번 대책은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제공하기 위한 취지”라며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돈이 공급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폴란드 콜롬비아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체코 등 신흥국 중앙은행도 3월 중순부터 잇달아 대규모 양적완화를 선언했다. 일부 국가는 정부 보증을 받은 회사채도 매입할 계획이다. 폴란드와 남아공 중앙은행은 국채와 회사채를 제한 없이 매입하겠다고 했다. 필리핀 중앙은행은 향후 6개월간 국채 60억달러어치를 사들이기로 했다. 콜롬비아 역시 25억달러 규모의 회사채 매입 계획을 내놨다.

양적완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일본 등 기축통화국이 써온 통화정책 수단이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약 4조달러의 양적완화를 시행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금융시장의 불안이 이어지자 지난 23일엔 ‘무제한 양적완화’ 카드를 꺼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12년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 무제한 양적완화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신흥국들은 여러 번의 금융위기 상황에서도 양적완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자국 통화가 시장에 대거 풀리면 통화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하고 자본 유출이 발생하는 등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FT는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하자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극단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 정책으로 이달 초 치솟았던 신흥국 국채 수익률이 하락하는 등 단기 성과를 내고 있다”고 평했다.

부도 위험 커지는 신흥국

신흥국의 양적완화 효과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많다. 기축통화국인 미국과 유럽에서도 양적완화의 경기 부양 효과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가운데 신흥국이 양적완화를 추진하는 건 되레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알베르토 라모스 골드만삭스 중남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FT에 “실업률이 높고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신흥국에선 양적완화가 제대로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신흥국의 재정 상태가 대체로 취약하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정부 부채가 이미 과도한 상황에서 재정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은 통화정책만으로는 경기 부양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신흥국의 대규모 양적완화가 경기 부양 효과는 내지 못한 채 통화가치 급락이라는 부작용이 불거져 외환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도 신흥국의 국채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를 경고했다. 무디스는 이날 배포한 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 여파로 만기가 도래한 국채 상환 부담이 큰 터키와 스리랑카, 온두라스, 튀니지 등이 재융자(리파이낸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심은지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