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회원국 간 국경을 없애 ‘하나의 유럽’을 이루는 토대가 된 솅겐조약이 시행된 지 25년 만에 존폐 위기를 맞았다. 회원국 간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해온 솅겐조약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유럽 전역으로 퍼뜨린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국경통제에 나서면서 솅겐조약은 효력을 상실했다. 유로화와 함께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불리는 솅겐조약이 폐지될 경우 EU가 존립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경 없애 자유로운 이동 보장

솅겐조약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5개국이 1985년 6월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인 솅겐에서 맺은 국경폐지 조약이다. 10년 후인 1995년부터 효력이 발휘됐다. 이후 유럽 국가들이 속속 솅겐조약에 가입하면서 26개국으로 확대됐다.

솅겐조약은 EU 27개 회원국 중 22개국과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등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4개국 등 총 26개국이 가입했다. EU 회원국 중 아일랜드는 가입을 거부했고,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루마니아 등은 조약에 서명은 했지만 가입은 보류된 상태다.
伊서 잡지 못한 코로나…솅겐조약이 '유럽 대재앙' 만들었다
솅겐조약의 핵심은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이다. 조약 가입국 간 국경을 통과할 때는 여권 및 세관 검사를 하지 않는다. 비자도 필요 없다. 가입국 중 한 곳에만 발을 들이면 다른 나라를 이동할 때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항공편으로 이동할 때도 국내선처럼 간편하게 탈 수 있다.

솅겐조약은 유로화와 함께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불린다.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EU 단일시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통관수속 및 입국절차 등이 모두 사라지면서 비용과 시간이 절감됐다. EU에선 매일 200만 명이 국경을 넘어 출퇴근하고 있다.

솅겐조약의 혜택은 가입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약 가입국에 공장이 있는 한국 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상품을 이전해도 어떤 제약을 받지 않는다. 외국인도 가입국에 처음 입국할 때만 심사를 받고, 6개월 이내 최대 90일까지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다.

난민·테러 여파로 본격적 위기

솅겐조약은 출범 때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유럽 전역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불법체류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국경이 없다 보니 유럽 각국을 이동하는 불법체류자도 부지기수였다. 영국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전부터 조약 가입을 거부한 것도 불법체류자의 최종 목적지가 영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도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온 건 2015년부터다. 2015년 시리아·이라크 내전 등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난민들은 터키에서 솅겐조약 가입국인 그리스와 발칸국가, 오스트리아를 따라 유럽으로 이동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몰려드는 난민을 막기 위해 인접 국경을 잇따라 폐쇄했다.

2015년 11월 프랑스 파리, 2016년 3월 벨기에 브뤼셀에선 폭탄테러가 연이어 발생해 1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는 테러리스트들을 잇달아 난민으로 위장 잠입시켰다. 밀려드는 난민 속에서 테러리스트들을 가려내는 건 불가능했다. 솅겐조약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럽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EU의 양대 축인 독일과 프랑스는 ‘솅겐조약이 없으면 유럽도 없다’며 국경폐쇄를 반대했다. 독일이 앞장서 난민에게 국경을 개방하면서 조약은 간신히 유지됐다.

코로나 사태로 솅겐조약 수정 불가피

지난달 말부터 유럽 전역으로 확산한 코로나19 사태는 솅겐조약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이탈리아에서 확진자가 잇따라 발생하기 시작하자 인접 국가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국경통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제동을 걸었다. 집행위는 지난달 24일 회원국들의 국경폐쇄 조치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적극 동조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경폐쇄가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탈리아 인접 국가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잇따랐다.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입국한 감염자들로부터 확산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에서 확진자가 1000명 이상 속출하자 각국 정부는 국경 문을 닫기 시작했다. 국경통제를 비판했던 독일이 앞장서 인접 5개국과의 국경을 차단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솅겐조약 효력 중단을 선언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폴란드 체코 스위스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이 잇따라 국경을 막았다. 회원국들이 각자도생에 나서면서 솅겐조약은 무력화됐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뒤늦게 지난 16일 외국인의 EU 입국을 차단하는 대신 솅겐조약 가입국 간 교류는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원국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다.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솅겐조약 유지를 고수해왔던 메르켈 총리조차 “조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시간 22일 오후 4시 현재 유럽 전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17만 명에 이른다. 중국(8만1000여 명)의 두 배를 웃돌고 전 세계 확진자의 60%에 달한다. 사망자는 8000명에 이른다. 하루에만 1000명이 훨씬 넘게 사망하고 있다. 21일 하루 이탈리아 사망자는 800명에 육박했다. 확진자 수를 보면 이탈리아가 5만 명을 넘어섰으며 스페인과 독일은 2만 명을 넘었다. 프랑스가 1만5000명에 근접하고 있으며 스위스와 영국도 5000명을 넘어섰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독일에 이어 영국도 20일 밤부터 펍과 음식점 등 상점 영업을 금지했다. 독일 바이에른주도 이날부터 주민 이동을 전면 금지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