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 최고 번화가 중 하나인 피카딜리서커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포에 거리는 평소에 비해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스크를 쓴 사람은 여전히 찾기 힘들었다. 간혹 있어도 열에 아홉 이상은 동양인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도 마스크를 쓴 현지인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몇 시간 뒤 런던의 또 다른 번화가인 소호 지역의 한 아이리시펍(pub).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을 기념하는 ‘성 패트릭 데이’를 맞아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일랜드 이민자가 많은 영국에선 이날을 기념해 곳곳의 일부 펍에선 축제가 벌어졌다. 전날 보리스 존슨 총리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국민들의 펍 출입자제를 강력히 당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이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탈리아의 누적 확진자 수는 3만명을 넘어섰다. 스페인과 독일, 프랑스 등도 확진자가 1만명 안팎에 이른다. 영국의 공식 확진자 수는 1500여명. 하지만 영국 정부는 실제 확진자 수는 5만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했다.

더욱이 코로나19 확산 속도는 중국 등 아시아 국가를 훨씬 앞지를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통상 의료와 문화 등 각종 분야에서도 선진국으로 떠받들여지는 유럽에서 코로나19가 이토록 빨리 확산된 이유는 뭘까. 현지 언론과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각국 정부의 초기방역 실패 △안이한 위생문화 및 개인주의 문화 △의료시스템 미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초기 방역에 실패한 유럽

우선 유럽 각국 정부는 코로나19 초기 방역에 완전히 실패했다. 중국과 한국에서 코로나19가 최고조에 치달았던 이달 초까지도 유럽은 한가한 반응이었다. 중국과 한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에 국한된 전염병으로만 봤다. 감기나 몸살 등의 증상만 없으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도 입국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더욱이 유럽연합(EU) 한 국가에 입국하면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데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EU 회원국 간 항공편에서 내리면 입국심사도 거치지 않고 입국장으로 나갈 수 있는 공항도 적지 않다.

이탈리아에선 아직까지 첫 지역 감염자로 바이러스를 전파한 이른바 ‘0번 환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확진자가 3만명이 넘은 현 상황에서 0번 환자를 찾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0번 환자조차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이탈리아 정부가 초기 방역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더욱이 지난달 말부터 이탈리아에서 확진자 수가 빠르게 급증했음에도 유럽 각국은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EU 회원국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 셍겐조약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검문강화 조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 히드로·개트윅공항 등 유럽 주요 공항에선 이탈리아발 항공편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발열 확인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유럽 전역에 코로나19가 빠르게 퍼지는 건 어찌보면 예상된 수순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한 각국 유럽 지도자들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국경폐쇄는 없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를 이끄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도 검문 강화를 반대했다. 이탈리아발(發) 코로나19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상황을 앞두고도 ‘하나의 유럽’이라는 EU의 확고한 원칙만을 고수했다.

이탈리아발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되자 유럽 각국 정부는 뒤늦게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이탈리아가 전국민 이동금지령과 상점 폐쇄를 내렸고, 스페인과 프랑스 독일 등이 뒤따랐다. 영국도 지난 16일에서야 강력한 외출 자제령을 내렸다. 유럽 각국의 검문 강화와 국경통제도 이 무렵에서야 이뤄졌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유럽 전역의 지역사회에서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안이한 위생문화도 한몫

이달 초부터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선 손소독제를 비롯한 위생용품과 즉석식품, 파스타면, 휴지 등의 사재기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각국 정부도 철저한 손씻기 등 위생 캠페인에 나섰다.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이 올라간 것도 이 때부터였다. 유럽 각국의 신문들도 이 때부터 코로나19 사태를 연일 1면에 보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뿐이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에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모습이 이어졌다. 대규모 관중이 모이는 스포츠 경기도 평소처럼 치뤄졌다. 지난 11일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유럽챔피언스리그 축구경기(사진)엔 수만명의 관중이 몰렸다. 수백년 전통을 보유한 영국의 경마축제인 첼튼햄 경마도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수만명의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거리의 펍과 음식점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영국뿐만이 아니다. 기자가 이달 초 취재차 다녀온 스페인과 프랑스, 아일랜드 등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유럽 곳곳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은 거의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마스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에선 마스크는 환자만 착용하는 것이며 외모를 해친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또 테러리스트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복면을 많이 한다는 점이 마스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한 동양인들에 대한 인종 혐오차별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마스크를 항상 착용하는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를 비웃는 듯한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 ‘마스크가 코로나19 예방에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유럽 각국 보건당국의 권고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부분의 유럽 국민들은 여전히 코로나19를 독감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통상 유럽에선 독감은 병으로 치지도 않는다. 독감으로 아무리 고생해도 병원 치료를 받기도 힘들다. 대부분 약국이나 마트에서 감기약을 구입하는 정도다. 한인 교민사회에선 “치료를 받기 위해 며칠간 병원 진료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너무 흘러 독감이 저절로 낫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볼키스와 포옹 등 유럽 특유의 스킨십 문화도 코로나19를 확산시킨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자 유럽 정부가 신체적 접촉을 자제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을뿐 아니라 동양 문화권에 비해 손씻기 등 위생에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점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럽 각국 정부가 일제히 손씻기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선 유럽 국가 중에서도 영국에서 이런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침착하게 하는 일을 계속하자’(Keep Calm and Carry On)는 영국 특유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구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을 연일 받는 와중에 영국 정부가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제작한 포스터다. 존슨 총리가 펍과 공공시설 등의 출입을 강력 권고했음에도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이런 권고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독일 정부가 술집 등 상점을 강제 폐쇄하는 초강수를 둔 것도 자발적 권고만으로는 국민들의 인식을 바꿀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16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도 “지금 우리는 전쟁 중인 상황인데도 공원과 술집 등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특유의 개인주의 문화도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된다. 영국 등 유럽 언론은 최근 들어 한국의 방역 사례에 대해 잇단 분석을 내놓고 있다. 가장 주목하는 건 확진자 동선을 낱낱이 공개하는 앱이다. 그러면서 이런 방역대책은 유럽에서 실행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유럽에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개인 동선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건 금기시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의료시스템

통상 유럽 각국은 모든 국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우수한 의료시스템을 제공하는 의료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럽 국가에서 한 번이라도 병원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유럽 의료시스템 부실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무상의료를 앞세운 보편적 의료복지가 전체적인 의료시스템의 질 하락을 불러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반면 유럽 각국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의료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이면서 의료서비스 수준이 낮아졌다는 반론도 나온다.

유럽에선 국내처럼 26만명이 넘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확진 검사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구가 6000만명이 넘는 영국에서조차 4만여명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하는 데 그쳤다. 예를 들어 영국은 감기나 몸살 등의 증상이 있으면 병원을 찾아오지 말라고 권고한다. 집에 2주일간 머물며 자가격리를 하라고 하는 게 전부다. 만 70세 이상의 고령자 등 고위험 대상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조언을 하고 있다. 사실상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에만 국민건강서비스(NHS) 111번으로 신고하라는 뜻이다.

코로나19 중증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상조차 부족하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에서조차 코로나19 환자 급증으로 호텔과 행사장 등을 임시 병동으로 개조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영국은 전국 병원에서 암을 제외한 모든 비응급 수술을 다음달 15일부터 전면 연기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중증 환자를 위한 병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이 같은 수술연기가 최소한 3개월 동안 시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