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2011년에 이어 제2의 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위축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부채 증가를 감수하고 막대한 재정을 풀 채비를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를 막기 위한 재정투입이 EU 재정위기로 이어져 세계 경기침체를 불러오는 악순환이 빚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탈리아 정부는 1일(현지시간)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36억유로(4조8000억원) 규모의 긴급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로베르토 구알티에리 경제장관은 “매출이 25% 감소한 기업을 대상으로 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며 “보건시스템을 위한 감세와 현금 지원도 이뤄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긴급자금 투입 규모는 이탈리아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0.2%에 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주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긴급 지원하기로 결정한 9억유로 상당의 자금과는 별도의 추가 지원이다. 앞서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코로나19에 따른 경기부양을 위해선 이탈리아에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며 “경기부양에 따른 재정지출을 위해 EU에 승인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에 따르면 이날 기준 이탈리아의 코로나19 확진자는 1694명으로 집계됐다. 전날 밤(1128명)에 비해 566명 증가했다. 중국과 한국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다. 사망자는 전날 대비 5명 증가한 34명으로 집계됐다. 이탈리아 내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거점인 북부 지역의 확진자 수가 90%를 넘고 있다. 이탈리아 보건당국은 아직까지 최초 감염자이자 지역사회 감염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이른바 ‘0번 환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확진자 수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에선 코로나19 확진자가 이날 기준으로 하루 만에 51명이 늘어난 117명으로 집계됐다. 프랑스의 코로나19 확진자는 73명이다.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에 따르면 일부 동유럽 국가를 제외하고 유럽에선 지금까지 총 23개 국가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집계된 동유럽 국가는 상대적으로 보건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 실제 확진자는 더 많을 것이라는 게 현지 언론의 추정이다.

당초 EU 집행위는 이탈리아의 재정지출 확대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었다. 이탈리아의 정부부채 비율이 2011년 과도한 부채로 유럽 전역에 재정위기를 확산시켰던 그리스에 버금갈 정도의 위험수준에 도달했다는 판단에서다. 이탈리아는 2018년 말 기준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134.8%에 달한다. 재정위기를 겪었던 그리스(181.2%)에 이어 EU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 이탈리아는 포퓰리즘 정부가 집권한 이후 복지지출을 계속 확대하면서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해마다 늘고 있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008년 106.1%에서 10년만인 2018년 134.8%로 30%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통화정책은 유럽중앙은행(ECB)이 맡지만 재정정책은 회원국이 독자 운영한다. 회원국의 경제적 격차 축소 및 재정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EU는 재정정책 준칙인 안정·성장협약(SGP)을 시행하고 있다. 재정적자는 GDP의 3% 이내, 정부부채는 GDP의 60% 이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EU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지난해 GDP 대비 재정적자가 EU가 정한 ‘3% 룰’을 위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기부양을 위해 자금을 투입하면 재정적자 비율은 가파르게 치솟을 전망이다. 통화정책을 ECB가 맡고 있는 상황에서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방법은 과도한 재정적자를 무릅쓰고서라도 빚을 내 재정을 투입하는 방법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EU 집행위는 그리스보다 경제 규모가 열 배 가까이 큰 이탈리아에서 재정위기가 불거지면 유로존 전체로 위기가 확산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이탈리아의 GDP 규모는 2조838억달러로 같은 기간 그리스(2180억달러) 대비 열 배에 육박한다. 당초 EU가 이탈리아의 재정지출 확대를 반대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코로나19 확진자가 이탈리아에서 급증하면서 EU가 방침을 바꿨다는 것이 현지 언론들의 분석이다.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EU 집행위 재정담당 집행위원은 지난달 26일 “코로나19의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회원국들의 재정수지 관리에 유연하게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EU 재정준칙은 중요한 전제조건일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재정수지 불균형이 매우 심각한 상태”라면서도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에서 재정준칙의 예외조항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정지출 확대 논란은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때부터 불거진 EU의 해묵은 논쟁 중 하나다. 마이너스 금리라는 극약 처방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하자 일부 회원국들은 경기 부양을 위해 부채 증가를 감수하고 막대한 재정을 풀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유럽 전역에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등 다른 EU 회원국들도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당초 계획보다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EU 회원국의 코로나발(發) 재정투입이 가뜩이나 침체에 빠져 있는 유럽 내수경기를 살릴 수 있느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를 막기 위한 재정투입이 자칫 ‘재정적자 확대’→ ‘유럽 재정위기’→‘글로벌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