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등 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역내 데이터 단일시장 구축에 나선다. EU 기업 간 활발한 데이터 공유를 통해 거대 IT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은 EU가 정한 자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엄격한 규제를 적용하기로 했다. 디지털세 부과에 이은 EU의 AI 규제가 미국 IT 기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19일(현지시간)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데이터 시대의 전략백서’를 공개했다. 데이터 단일시장 구축, AI 및 안면인식 기술 규제 등을 아우르는 EU의 향후 전략을 담은 초안이다. 집행위는 백서 서문에서 “소수 기업들이 전 세계 데이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유럽은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는 AI 시스템에서 세계 리더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 기업이 주도권을 가진 AI 시장에서 EU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EU가 내놓은 AI 전략의 핵심은 의료, 치안, 교통, 법률 등의 고위험 분야에서 AI 시스템을 사용할 경우 EU가 지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거 집행위 수석 부위원장(사진)은 이날 브리핑에서 “AI 기술은 인간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며 “유럽 시장에 적용되기 전에 당국이 정한 테스트와 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집행위는 AI 기술에 대한 정확하고 신뢰성있는 테스트를 위해 ‘적합성 평가기준’을 조만간 제정하기로 했다. 특정 AI 기술이 이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제재를 부과하기로 했다. AI 분야에서 유럽에 비해 앞서 있는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등 미국 IT 기업들을 견제하려는 노림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집행위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안면인식 기술에 대해선 구체적인 방침을 내놓지는 않았다. 다만 집행위는 “안면인식 기술은 AI 기술의 일부”라며 “생체인식 기술이 어느 정도 허용돼야 하고, 예외를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앞으로 폭넓은 토론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EU 집행위는 기업과 연구소, 공공기관 등이 자유롭게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역내 데이터 단일시장을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제조업, 농업 및 에너지 등 각종 분야에 데이터 호환성 표준과 데이터 이전 등에 관한 규정을 마련해 EU 내에서 데이터가 자유롭게 오가는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EU는 데이터 공유 및 접근과 사용에 대한 규정을 수립할 계획이다. 이 규정은 개인정보보호, 소비자 보호, 경쟁 규정 등 EU의 가치와 권리를 전제로 한다고 덧붙였다. EU 기준을 충족하는 EU 회원국 기업들 간에는 사실상 어떤 규제나 관세 없이 각종 데이터를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집행위는 지리, 환경, 기상, 통계, 기업 정보 등 각종 분야의 더 많은 공공 데이터도 EU 기업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기로 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EU가 내놓은 이날 전략은 미국 IT 기업들의 AI 기술을 견제하고 EU 기업들의 데이터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미 IT 기업들이 AI와 데이터 사용에 있어 EU에서 새로운 규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EU 집행위는 전략백서를 토대로 정책자문 등을 거쳐 AI 및 데이터 분야 최종 전략을 올 연말 확정할 예정이다. EU 27개 회원국의 승인과 유럽의회의 비준을 거치면 이 전략은 곧바로 실행에 부쳐진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