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대통령 "독일-소련 전체주의 체제 담합이 전쟁 촉발"
크렘린 "파시즘으로부터 유럽 해방시킨 소련 후손에 대한 모독"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는 옛 소련 국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제2차 세계대전 개전의 책임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근년 들어 친서방 노선을 걷으며 옛 소련 잔재를 청산하려 애쓰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2차 대전 개전에 소련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나치로부터 유럽을 구했다는 자부심을 가진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계기가 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폴란드 아우슈비츠 나치 강제수용소 해방 75주년을 맞아 폴란드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해 "폴란드와 폴란드 국민은 전체주의 체제 간 담합(의 결과)을 가장 먼저 직접 경험했다"면서 "이는(담합은) 2차 세계대전 개전으로 이어졌고 나치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죽음의 수레바퀴를 가동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갈등 관계' 러시아-우크라, 2차대전 개전 책임론 두고 논쟁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이라는 두 전체주의 국가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나치의 전쟁 개시를 가능케 한 만큼 독일은 물론 소련도 2차 대전에 똑같이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젤렌스키는 또 소련군이 1945년 1월 27일 유대인들이 갇혀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한 것과 관련해서도 해방 작전에 참여한 우크라이나인들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소련은 언급하지 않았다.

독·소 불가침 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상과 독일의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 사이에 체결됐다.

불가침 조약은 부속 조항으로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 폴란드 등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양분하는 비밀의정서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약 체결로 소련과의 전쟁으로 형성될 동부 전선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 독일은 곧바로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대전의 문을 열었고 뒤이어 프랑스 등 서유럽을 공격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은 2차 대전 개전의 책임을 독일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지우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폴란드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폴란드 의회는 이달 초 소련이 나치 독일과 나란히 2차 대전 개전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폴란드 외무부는 소련군이 나치로부터 폴란드를 해방시키긴 했지만 자유를 가져다주진 않았다고 밝혔고, 폴란드 집권당 대표 야로슬라프 카친스키는 전쟁 기간 폴란드가 입은 피해에 대해 러시아가 배상해야 한다고까지 요구했다.

'갈등 관계' 러시아-우크라, 2차대전 개전 책임론 두고 논쟁
젤렌스키 대통령의 폴란드 발언에 대해 러시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8일 기자들의 관련 질문을 받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파시즘으로부터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부모와 할아버지, 친척을 둔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과 독립국가연합(CIS·옛 소련국가 모임) 소속국 국민들에게 모욕적인 견해에 연대를 표시했다"고 비판했다.

페스코프는 "이는 역시 손에 무기를 들고 파시스트들과 싸운 수백만 명 우크라이나인들의 믿음과도 배치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 발언을 잘못되고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하원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레오니트 슬루츠키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숨진 선조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한 발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어깨를 맞대고 싸운 가공할 만한 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전용사들도 모욕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러시아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소련에 대한 나치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015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2차대전 전 소련이 제안한 반(反)나치 집단동맹 체제 창설이 유럽국가들의 거부로 실패한 것이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됐다는 견해를 밝혔다.

푸틴은 "소련이 나치 독일과 1대 1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됐음을 깨닫고 히틀러와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체결한 것이 바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 강조했다.

'갈등 관계' 러시아-우크라, 2차대전 개전 책임론 두고 논쟁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