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美-이라크 균열 조장…"경제제재에 잃을 것 없어졌다"
"트럼프 '최대압박' 한계"…오락가락 중동정책 속 충돌위험 증가
"이란이 놓은 덫에 걸려" 트럼프 중동정책 점점 더 살얼음길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이 시아파 민병대 공습에 반발하는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사건은 미국의 대(對)이란 정책의 한계와 혼란을 단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라고 중동 전문가들이 평가했다.

슈퍼파워의 영향력을 지키고 싶지만 개입 확대를 원치 않는 진퇴양난에 빠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란이 놓은 덫에 걸린 모습으로 묘사됐다.

지난달 31일(바그다드 현지시간) 오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관 앞에 몰려든 반미 시위대 수천명 중 일부가 철문을 부수고 경내로 난입해 점거를 시도했다.

주이라크 미국대사관이 시위대 습격을 당한 것은 처음이다.

이라크 정부와 정치권도 '주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란이 놓은 덫에 걸려" 트럼프 중동정책 점점 더 살얼음길
이라크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로버트 포드 전 시리아 주재 미국대사는 지난 석 달 간 이어진 반정부 시위에서 표출된 반(反)이란 민심이 반미 정서로 전환할 가능성을 지적하며, "미국이 이란이 친 덫에 걸렸다"고 AP통신에 평가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반미 시위와 미국대사관 습격이 이번에 미군의 폭격을 당한 카타이브-헤즈볼라 주도로 벌어졌다고 보도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주둔 부담을 늘리고 미국·이라크 사이 균열을 내려는 전략에서 나온 움직임"이라고 진단했다.

"이란이 놓은 덫에 걸려" 트럼프 중동정책 점점 더 살얼음길
트럼프 행정부의 대이란 정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경제 제재를 통해 이란의 양보를 받아내려는 '최대 압박' 작전에도 이란은 항복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걸프 지역 곳곳에서 시아파 민병대 등을 동원한 군사행동을 펼치고 있다.

바버라 리프 전 아랍에미리트(UAE) 주재 대사는 "이란은 지난 6개월 동안 최대 압박 작전에 매우 체계적으로 대응한 반면에 미국은 그 대응에 실질적으로 무반응으로 일관했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은 "미국이 경제 제재로 이란 경제를 파괴하려다 보니 (역설적으로) 이란은 잃을 게 없어졌다"고 분석했다.

"이란이 놓은 덫에 걸려" 트럼프 중동정책 점점 더 살얼음길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의사결정도 이란의 행동을 방치했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 주둔군 철수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지상군 작전을 기피하는 성향을 드러냈다.

작년 6월 이란의 미국 무인기 격추한 데 대한 보복 폭격을 지시했다가 '몇분 전에' 취소하는가 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핵심 석유시설이 공격을 받았을 때도 응징에 나서지 않았다.

미군 철수를 줄곧 외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억지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사우디 주둔 미군은 되레 늘리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포드 전 대사는 공격해야 할 사안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부작용이 예상되는 카타이브-헤즈볼라 폭격을 승인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 실수"라고 주장했다.

리프 전 대사도 트럼프 행정부가 '레드라인'이 있는지 알 수 없게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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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주(州)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31일(미국동부 현지시간) 미국대사관 공격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면서 "완전하게 책임을 물리겠다"고 경고했지만 미국의 대응 수단은 제한적이다.

시아파 민병대의 대규모 조직을 고려할 때 이들의 추가 공격과 미국인 인명피해는 재현될 우려가 크다.

미국으로서는 미국인 인명피해를 방치할 수도 없고 이번 카타이브-헤즈볼라 시설 폭격 같은 강수로 이라크를 자극하기도 곤란한 실정이다.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매파 성향 보수당 지지자와 본인의 무력 사용 거부감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중동 전문가 애런 데이비드 밀러는 "트럼프 대통령은 한편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과 분쟁 고조나 이라크 개입 확대를 피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야권에서는 이란핵합의(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탈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도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을 궁지로 몰아 탄도미사일, 역내 세력확장을 억제해야 한다며 핵무기 개발을 자제하는 대가로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바 있다.

이란은 미국의 경제제재 복원에 반발해 대리세력을 통한 도발을 이어가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톰 유돌(민주·뉴멕시코) 의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동에서 저지르는 무모한 엄포, 긴강고조, 계산착오의 예상 가능한 결과는 미국인들이 지지하지 않고 의회의 승인이 없이 미국이 이란과의 전쟁으로 치닫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