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에 제기되는 각종 분쟁에서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AB: Appellate Body)가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미국이 AB가 중국 등을 부당하게 지지한다는 이유로 AB 상소위원 신규 선임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9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AB는 10일부터 ‘개점 휴업’에 들어갈 전망이다.

AB 전체 상소위원은 총 7명이지만 미국이 임기가 끝난 자리의 신임 위원 임명에 반대하면서 현재 3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 3명 중 2명의 임기가 10일 만료된다. AB는 최소 3명의 상소위원이 심리를 한다.

AB를 포함한 WTO의 각종 기구는 만장일치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미국이 계속 반대하면 AB의 정상화가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은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이 WTO에서 아직 개발도상국 특혜를 누리고 있고, 중국의 불공정 무역을 단속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AB가 제동을 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미국은 AB 상소위원 선임을 거부해왔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지속하고 있다. WTO 본부가 있는 제네바 주재 미국대표부의 드니스 시어 대사는 지난 6일 “미국이 보기에 AB 개혁안이 도출되지 않았다”며 상소위원 선임에 협조할 뜻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필 호건 유럽연합(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1995년 출범한 WTO가 창설 24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국제무역의 규칙이 재판을 통해 강제되지 못하면 힘의 논리가 판치는 ‘정글의 법칙’만 남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EU는 AB를 대체할 비공식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EU, 캐나다 등은 무역분쟁 재판이 기본적으로 2심 체제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WTO 패널 1심을 거친 후 2심 겸 최종심인 AB가 제 기능을 못 한다면 자체적으로라도 별도의 항소심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이다.

WTO는 미국 등 주요 구성국과 함께 AB를 포함한 광범위한 개혁안을 논의해나갈 방침이다. 그러나 AB를 대체할 과도 기구가 없으면 WTO의 패널 1심 이후 추가 절차가 없어지기 때문에 논의 도중에라도 임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EU 등의 입장이다.

다수의 국가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AB를 아예 없애기보다는 고쳐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