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로 유명한 미국 사무기기 업체 제록스가 프린터·PC 업체 휴렛팩커드(HP)에 두 차례나 인수 제안을 했지만 거듭 거부당하자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제록스와 HP 지분을 보유한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두 회사의 합병을 요구하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미국 CNBC방송에 따르면 존 비젠틴 제록스 최고경영자(CEO)는 26일(현지시간) HP에 보낸 편지에서 335억달러(약 39조5000억원)에 HP를 인수하려는 계획을 주주에게 직접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비젠틴 CEO는 “우리는 HP 주주들과 직접 접촉해 HP 이사회가 올바른 일을 해 이 매력적인 기회를 잡으라고 촉구하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HP와 제록스 간 합병의 잠재적 이익은 자명하다”며 “두 회사가 힘을 합치면 우리는 업계 리더가 돼 혁신에 더 많이 투자하고 주주를 위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합병으로 커진 회사 규모를 기반으로 제품 전반에 걸쳐 업계 최고의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록스는 앞서 지난 6일 HP에 주당 22달러, 총 335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HP 이사회는 이 방안이 HP의 가치를 크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며 만장일치로 거절했다. 그러자 제록스는 25일을 시한으로 못 박고 인수 제안을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면서 여의치 않으면 적대적 M&A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비젠틴 CEO의 이번 편지는 HP가 재고 요청마저 거절하자 일반 주주를 상대로 지분 매집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이다.

제록스의 적대적 M&A 선언은 제록스와 HP의 지분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의 지지를 받고 있다. 아이칸은 제록스와 HP의 지분을 각각 10.60%, 4.24% 갖고 있다. 그는 두 회사의 합병이 비용 절감은 물론 프린터 분야에서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이룰 수 있다며 합병을 적극 요구해왔다. 아이칸은 두 회사의 합병에 대해 ‘노 브레이너(no-brainer, 뇌를 쓸 필요도 없이 쉬운 결정)’라고 했다. 그는 한국에선 2006년 KT&G를 공격한 일로 유명하다.

제록스가 HP 인수에 성공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시가총액으로 봤을 때 제록스는 83억달러인 반면 HP는 세 배를 뛰어넘는 297억달러에 달한다. 제록스는 이달 초 일본 후지필름과 57년간 유지해온 합작 관계를 청산하면서 후지제록스 지분 25%를 23억달러에 매각해 현금을 확보했다. 또 은행 등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HP 인수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소식통을 인용해 “씨티은행이 제록스의 HP 인수를 지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제록스의 HP 인수가 성사되면 비젠틴 CEO가 회사를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복사기가 주력 사업인 제록스는 100억달러 정도인 연 매출 대부분을 기기 대여 및 유지 사업에서 올리고 있다. 제록스는 HP 인수 뒤 중복된 사업을 줄여 연간 20억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