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랄레스 퇴진 이후 원주민들 격렬 시위 연일 지속…국민 간 분열·갈등도 심화
[르포] 분노·증오 가득찬 거리…볼리비아는 보이지 않는 내전 중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 근교의 농촌 지역 엘알토에 사는 원주민들은 15일(현지시간)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원주민 상징 깃발 '위팔라'와 나무 막대 등을 들고 전통의상을 입기도 한 시위대가 해발고도 4천150m의 엘알토에서 꼬불꼬불 길을 따라 내려와 고도 3천640m의 라파스 도심으로 행진하는 데에는 두 시간이 걸렸다.

수만 명의 시위대는 도심에 몰려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복귀와 자니네 아녜스 임시 대통령의 퇴진 등을 요구했다.

도심 대로에서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경찰과 군이 막아선 탓에 시위대의 외침은 대통령궁까지 미치지 못했다.

시위대는 막아선 군인들 앞에서 "국민들과 함께 하자"고 호소했고, 경찰 앞에선 "배신자" "반역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경찰은 앞서 모랄레스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합류했고, 위팔라를 태우는 행동으로 원주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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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어느 골목에서 성난 시위대 서너 명이 경찰이 건축자재 등으로 세워둔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렸다.

호기롭게 바리케이드를 치우고도 선뜻 전진하지 못한 채 시위대가 머뭇거리는 사이 경찰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고 달아났다 다시 몰려들길 반복하던 시위대는 경찰이 한꺼번에 다량의 최루탄을 대로에 발사해 순식간에 현장이 아비규환이 되자 결국 후퇴했다.

최루탄 연기에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다시 꼬불꼬불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원주민들의 얼굴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다.

전통의상을 입은 마리아는 "내일도 또 거리에 나오겠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겠다"고 결연하게 말했다.

몇 번의 충돌이 있었지만 대낮 시위였던 데다 많은 군인과 경찰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시위 초반 빈번했던 약탈과 방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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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위 현장에 넘쳐난 엄청난 분노와 증오, 슬픔은 "이젠 내전"이라는 시위대의 구호가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가 시작된 것은 지난 10일 모랄레스의 퇴진 이후였다.

볼리비아 첫 원주민 대통령인 모랄레스가 지난달 20일 대선에서 부정을 시도했다는 의혹 속에 사임하자 원주민들을 비롯한 모랄레스 지지자들은 '쿠데타'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모랄레스 퇴진을 이끈 야권 시위대와 재빨리 모랄레스의 공백을 메운 임시 대통령을 비난했고 원주민들 존중해달라고 요구했다.

좌파 정권이 물러나고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원주민은 다시 2등 시민이 되고,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도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했다.

모랄레스가 실제로 선거 결과를 조작했는지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인터뷰 요청에 격정적으로 분노를 토해내던 한 시위자는 모랄레스의 대선 부정 논란에 대해 묻자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을 돌렸다.

대신 자신들이 얼마나 소외되고 차별받았는지에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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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한 대학생 시위자는 "볼리비아 언론과 정치인들은 돈 많은 이들, 대도시에 살고 얼굴색이 하얀 이들만 신경 쓴다"고 울먹였다.

야권 시위를 주도한 루이스 페르난도 카마초가 부유한 기업인의 자제라는 점도 이들이 크게 분노하는 대목이었다.

도시에 사는 부자가 가난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분노와 증오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 뒤에서 지켜보던 한 여성은 "시위대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온통 잘못된 소문만 듣고 와서 분노하고 있다"며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시위에 나온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 세 번의 대선에서 모랄레스를 뽑았으나 이번엔 제3의 후보를 택했다는 택시기사 안토니오 디아스는 "모랄레스 지지자들은 모랄레스가 눈감아준 불법 행위 등을 더이상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위 탓에 생계가 마비된 이들도 시위대에 반감을 키워가고 있다.

도심에서 복사점을 하는 한 백인 여성은 조심스럽게 기자에게 다가와 "너무 힘들다"며 "난 원주민들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남편이 죽고 복사로 한 푼 두 푼 벌어 혼자 애 둘을 키우는 처지인데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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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노점상을 하는 원주민 여성도 "난 (좌파 여당) 사회주의운동(MAS) 지지자도 아니고 야당 지지자도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지금은 살 수가 없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미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긴 분열의 골이 너무 깊어진 듯했다.

노점상 여인을 눈물을 뒤에서 지켜본 한 시위자는 기자에게 "저 분만 인터뷰하고 우리 얘기는 왜 안 듣느냐"고 항의했다.

'보이지 않는 내전' 상태가 됐지만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을 모색할 역할을 하는 이는 없었다.

멕시코로 망명한 모랄레스도, 과도 정부를 맡은 이들도 서로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택시기사인 디아스는 "볼리비아 사회의 분열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며 "모랄레스를 비롯한 정치인들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날 외신 기자들과 간담회를 한 임시 대통령 아녜스는 원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과 분노가 대체로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며 분노와 증오를 조장하는 정치는 끝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아녜스는 거리에 실재하는 분노를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해법은 제시하지 못했다.

[르포] 분노·증오 가득찬 거리…볼리비아는 보이지 않는 내전 중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