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고속질주하는 베트남 경제
국내 굴지의 자동차 부품 업체인 A사는 최근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하려다 난관에 부딪혔다. 베트남 과학기술부가 ‘첨단 기술 증명서’를 요구해서다. 외국인직접투자(FDI) 주무 관청(투자계획부)도 아닌 곳에서 전에 없던 증빙 서류를 요구한 터라 A사 실무진은 배경을 파악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2010년 이후 최고치를 찍을 정도로 베트남 경제가 질주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베트남이 돈과 기업을 가려 받기 시작했다.
베트남, 美·中 무역전쟁 반사이익…돈도 기업도 가려 받는다

펄펄 끓는 ‘세계의 공장’

베트남은 올 들어 3분기까지 6.9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9월 성적표로는 최근 9년 만에 가장 높다. 미·중 무역전쟁의 반사이익에 힘입었다. 연간 기준으로도 작년(7.1%)에 이어 2년 연속 7%대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성장세를 증명하듯 지난 8일 VN지수는 작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 1022에 마감했다. 작년 말 대비 11.83% 상승했다.

미·중 무역갈등을 비롯해 세계 경기를 둔화시키고 있는 여러 악재로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가 성장률 부진을 겪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의 선전이 두드러진다. 태국의 2분기 누적 성장률은 3%를 밑돌아 2015년 이후 가장 낮은 성적표를 받았다. 인도네시아도 2분기까지 5.6% 성장하는 데 그쳤다. 올 상반기만 해도 수출 의존도가 높은 베트남 역시 성장률 둔화를 면치 못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지난 7월 국제통화기금(IMF)은 베트남의 올해 성장률을 6.5%로 제시한 바 있다.

성장을 이끈 핵심동력은 산업·건설 부문이다. 올해 9개월 동안 베트남의 산업 생산은 전년 대비 9.6% 증가했다. 4년 만의 최고치다. 베트남을 수출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외국 기업들의 진출도 활발하다. 베트남 투자계획부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FDI 유치액은 291억1000만달러로 작년 동기보다 4.3% 증가했다. 미·중 무역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을 탈출해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기업들까지 가세해 베트남 주요 산업단지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싱가포르 샘콥과 베트남 정부의 합작 기업으로 산업단지를 개발하는 VSIP의 박병현 이사는 “2009년 분양 당시 75달러(㎡당)였던 박닌성 산업단지 임대료가 작년에 110달러까지 상승했다”며 “최근엔 140달러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박닌성으로 공장을 이전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한식당이 즐비했던 거리에 중국 마라탕집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고 전했다.
베트남, 美·中 무역전쟁 반사이익…돈도 기업도 가려 받는다

커지는 ‘차이나머니’ 경계령

베트남이 ‘나홀로 질주’를 거듭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수출 대부분을 외국인 투자기업이 일으키는 데다 증가세마저 둔화되기 시작했다. 올 3분기까지 베트남은 2063억달러어치를 수출해 총 37억7000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로는 8.6% 증가했다. 하지만 2017년 20.6%, 지난해 14.3%에 이어 감소세가 뚜렷하다.

대미 무역흑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베트남은 올 1~8월 미국에 393억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수입액은 94억달러에 그쳤다. 전체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2.9%에 달한다. 세계은행 등이 지속적인 대미 무역흑자로 베트남이 미국의 ‘타깃’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수출과 관련한 이 같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베트남 정부는 자국 산업과 기업을 키우기 위한 정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외투기업을 가려 받기 시작했다. 올 8월 응우옌푸쫑 베트남 국가주석이 서명한 ‘정부결의 50호’가 대표적 사례다. 결의안은 양적 팽창에만 주력했던 지난 FDI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목표를 내걸었다. 전체 FDI 내 첨단기술과 친환경 분야 비중을 2025년 50%, 2030년 100%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책 전환에 대해 ‘차이나머니’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중국의 저임금, 저숙련 제조 업체들은 베트남에 공장을 차려놓고, 원산지만 둔갑시키는 ‘무늬만 베트남산’을 생산하고 있다. 이미 중국(홍콩 포함)은 대베트남 최대 투자국으로 올라섰다. 베트남에 투자 중인 전체 107개 국가와 지역 중 중국이 64억5000만달러(올 10월까지 누계)로 1위를 차지해 한국(55억2000만달러)을 제쳤다. 법무법인 율촌 하노이 사무소의 이홍배 변호사는 “베트남의 강화된 환경 규제를 모르고 급하게 계약금을 걸고 공장 부지를 매입했다가 최종 허가를 받지 못해 계약금을 날린 중국 업체가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병목 현상도 나타나

베트남의 청사진이 현실화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가장 시급한 건 정부 재정 확충이다. 현재 베트남의 국가 채무는 상한선(GDP 대비 65%)에 거의 근접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FDI의 지속적인 유입에도 불구하고 관료사회의 오랜 부패 관행 등으로 공무원은 살찌고 정부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설이 빚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베트남 정부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외투기업에 약속한 세금 면제 등의 혜택을 축소하는 것은 사정의 급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LG전자 하이퐁 생산공장 관계자는 “경제개발구역(EZ) 내 외투기업의 임직원들은 개인소득세를 50% 면제받아왔는데 베트남 정부가 이를 없애기로 했다”며 “하이퐁 인민위원회는 이를 소급 적용하겠다고 통보해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영기업 매각과 부실 은행 정리 작업도 쉽지 않은 과제다. 이와 관련, 지난달 9일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베트남의 현재 신용등급(Ba3)을 하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조정 이유로 무디스는 채무 변제 지연 등 베트남 정부의 제도적인 취약성을 지적했다.

베트남으로 공장이 몰리면서 여러 병목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피치는 지난달 말 발간한 보고서에서 노동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지적했다. 올 3분기 임금만 해도 전년 대비 13% 올랐다. 현지 한 중소업체 대표는 “베트남은 내년 5월 지도부 교체를 앞두고 있다”며 “새로운 지도부가 FDI 유입 효과를 최대한 활용해 베트남의 경제 체질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바꿀 수 있느냐가 베트남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노이=박동휘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