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동독 주재 dpa 통신 특파원 인터뷰
"통일 후 실업사태 등으로 동독지역 시민 실망감 커져"
"통일, 동독시민에 충격적 체험…이민자 문제 등에 변화 저항심리 생겨"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 속에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일곱번 째 시리즈로, '미디어 교류'를 주제로 3일간 3개의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정치+문화연구소'의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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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獨 뒤흔드는 극우 진앙, 서독TV 못본 '무지의 골짜기'
(18) 통일은 '투자' vs '공포'…진보紙 사주·편집장도 갈려
(19) 분단기 서독 뉴스통신사의 동독특파원 인터뷰 ←←
[서독의 기억](19) "동독특파원 보도, 분단극복에 중요한 역할"
독일 뉴스통신사 dpa의 유럽지역 데스크로 옛 서독지역 출신인 클라우스 블루메(60)는 29년 전 동독 주재 특파원으로 통일의 순간을 맞이했다.

서독에서 파견한 마지막 동독특파원인 셈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듬해 블루메는 동독 마그데부르크 지역에 dpa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애초 dpa는 동독 주재 특파원을 동베를린에만 둘 수 있었는데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동독 당국의 통제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 마그데부르크와 드레스덴, 수베린, 에어푸르트 등지로 특파원을 늘렸다.

마침 블루메는 부모가 탈동독 출신이었다.

친할아버지는 동독에 계속 거주하고 있었다.

블루메가 어렸을 때는 선물 바구니를 들고 동독의 친척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블루메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 6월에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했다.

특파원으로서 업무를 시작하는 날이 7월 1일이었는데, 그날이 화폐통합이 시작된 날로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동독지역으로 파견된 서독 특파원들이 분단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화폐통합 당시 풍경은.
▲ 화폐통합 첫날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취재했다.

사무실 근처 펍에 카지노 기계가 하나 있었다.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하는 기계였는데, 동전 식별 장치를 동독 마르크에서 서독 마르크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을 봤다.

이러한 장면들을 모아 기사로 송고했다.

-- 동독 당국이 서독에서 온 특파원들에게 슈타지 감시원을 붙이는 등 활동이 상당히 제약됐었다던데.
▲ 내가 파견될 당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여서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기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특파원 파견이 이뤄졌을 때만 해도 특파원은 동독 당국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취재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도 내용에 대해 동독 당국이 불만을 품을 경우 추방이 되기도 했고 주재 연장신청이 거부되기도 했다.

공영방송 ARD의 동베를린 주재 특파원이 추방된 적이 있었다.

-- 새로운 환경이어서 취재 시 어려움도 따랐을 텐데.
▲ 특파원 생활 중 동독이라는 국가가 사라졌다.

기사 송고 등에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어렸을 때 방문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았다.

부모님이 동독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동질감도 컸다.

동독 시민들도 서독 특파원들에게 우호적이었고 도움도 많이 줬다.

[서독의 기억](19) "동독특파원 보도, 분단극복에 중요한 역할"
--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통일 논의도 진행되던 혼란기에 동독 시민의 서독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는가.

▲ 1990년에 이탈리아에서 월드컵이 열렸는데, 결승전에 진출한 서독이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했다.

당시 집 근처 펍에서 축구를 시청했는데, 동네 주민들이 서독을 자기 나라처럼 응원했다.

서독 선수들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 주민들이 "우리가 챔피언"이라며 외쳤다.

일반 동독 시민들은 서독의 승리를 자기 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다음날 만난 동독 국영기업체 사장은 "당신들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표현했다.

정치 엘리트 등 동독의 집권 세력은 통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셈이었다.

-- 동독 시민들이 처음에는 대체로 통일을 반겼지만, 통일 이후 불만도 생기는 것을 느꼈는가.

▲ 환호성은 통일 후 실망감으로 조금씩 바뀌었다.

대량 실업이 가져온 결과였다.

일대일 가치로 화폐통합을 한 것이 동독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줬다.

동독 공직자, 교직원 사회도 불안정해졌고, 서독으로 탈출했던 이들이 옛 거주지를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면서 해당 주택에서 거주하던 이들이 당혹해했다.

--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로 통일 정책을 놓고 언론 내부의 이견은 어땠나.

▲ 주간 슈피겔의 경우 발행인과 편집인의 입장이 달랐다.

사주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통일에 찬성했고, 편집인인 에리히 뵈메는 반대했다.

지식인 사회도 갈렸는데, 작가 귄터 그라스는 독일의 분단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죗값을 받는 것이라며 통일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치권에서 사회민주당의 유력 총리 후보였던 오스카 라퐁텐도 급속한 통일을 반대했다.

라퐁텐은 프랑스 접경지역인 자를란트 출신인데, '라퐁텐은 동독 사람들보다 프랑스 알자스 사람이 더 친숙해 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 1990년 당시 동독 인권운동가인 마리안네 비어틀러는 통일보다 동독 경제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는 라퐁텐을 상대로 "프랑스 음식과 이탈리아 해변이 당시 동쪽의 형제자매보다 더 흥미로운 것 아니냐"고 비판했고, 이 말은 상당히 회자됐다.

라퐁텐은 2014년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파리가 베를린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느냐'는 질문을 받고선 "(자를란트에서) 산술적으로 거리로만 봐도 그렇지 않으냐. 물론 나는 독일말을 프랑스 말보다 잘한다.

나는 사실 민족국가에 속해있는 독일인이라기보다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금 비어틀러도 프랑스 음식과 이탈리아 해변에 더 흥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통일 이후 상황을 봤을 때) 내가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진보 성향으로 동서독 교류·협력을 위한 신(新)동방정책을 주도한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는 분단 상황을 관리하면서 통일보다는 유럽통합에 더 주안점을 두는 경향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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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통일 논의가 활발히 진행된 동독 사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일은.
▲ 1990년 8월에 동독 작센안할트 지역의 구리광산으로 현장 취재를 하러 갔었다.

광산은 채산성이 떨어져 폐쇄 결정이 났는데, 노동자들이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당시 동독의 독자적인 생존을 주장하며 좌파 정당을 만든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가 찾아와 단식 농성에 지지를 보냈지만, 노동자들은 "40년간 연대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젠 지쳤다"고 항의했다.

결국 모드로 전 총리는 야유를 뒤로하고 현장을 떠났다.

동독 시민이 통일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서독의 기억](19) "동독특파원 보도, 분단극복에 중요한 역할"
-- 동서독 언론 교류를 통해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나.

▲ 상호 특파원 파견은 분단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베를린 주재 서독 특파원들이 동독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서독 시민이 시청했을 뿐만 아니라 서독 TV 전파가 닿는 동독 시민들도 볼 수 있었다.

서독 TV는 동독 시민에게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1989년 이후 서독 신문도 동독에서 볼 수 있었는데, 동독 시민들이 서독을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는 동독 신문사들이 dpa의 기사를 많이 인용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라이프치히의 민주화 시위 보도에 서독 시민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 통일 과정에서의 문제점과 현재 극우정당의 부상을 연결 지어본다면.
▲ 동독 시민에게는 통일은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세계가 사라지는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특히 실업은 부정적인 기억을 남겼다.

이 때문에 옛 동독지역에서 더 이상의 변화를 원치 않는 정서가 서독지역보다 커지게 된 것이다.

난민 등 이민자, 세계의 새로운 조류 등에 저항하는 심리가 옛 동독지역에서 큰 이유 중의 하나다.

정치적인 이야기이므로 dpa 기자가 아닌 사견으로 말하겠다.

극우 성향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 옛 동독 시민들이 표를 던지는 것은 일종의 항의투표 성향도 있다.

AfD의 지지층과 투표층은 동일하지 않다.

기성정치권에 항의를 보낸 것이다.

옛 동독지역에서 통일 이후 꾸준히 좌파당에 표를 던진 것도 마찬가지다.

-- 통일 논의 과정에서 서독 정부가 간과한 것은.
▲ 1980년대만 해도 사회적으로 분단 상황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당국마저도 분단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본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더구나 서독 정부는 통일을 관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후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로 시스템이 수십 년 간 달랐던 사회를 통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정치적 타당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대일 가치 대응으로 화폐통합을 하기 전에 더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사견이다.

#서독의기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