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끄지 살해 1년…'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종합)
지난해 10월 2일 오후 1시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 들어간 재미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당시 60세)가 나오는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슈끄지는 터키 국적의 연인 하티제 젠기즈와 결혼하기 위해 혼인 증명서류를 발급받으려고 총영사관을 방문한 터였다.

그의 실종은 총영사관 밖에서 기다리던 젠기즈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총영사관을 찾은 지 몇 분에서 한 시간 뒤 돌아갔다"라던 사우디 정부는 수상한 비밀 정보를 쥔 터키 정부의 집요한 여론몰이에 결국 살해 사실은 자인했다.

처음엔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번져 숨졌다고 변명했지만 결국 사우디에서 파견된 정보요원 팀에게 살해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전 세계를 경악케했다.

사건 장소가 외교 공관이었고, 시신을 훼손한 살해 수법 역시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시신의 행방도 아직 알 수 없다.

터키 내 현지 조력자에게 건네 유기됐다는 소문과 사우디 총영사관 관저 정원에 있는 불가마에서 불에 태워졌다는 의혹, 이 정원의 우물에 넣어 강산성 화학물질로 녹였다는 보도 등이 엇갈렸다.

그를 살해한 이들이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선은 온통 왕세자에게 쏠렸다.

평소 사우디 왕실을 비판하던 유력 언론인 카슈끄지를 못마땅해한 그가 급기야 살해를 교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여성의 인권을 증진하고, 석유에 의존하는 사우디의 산업구조를 변혁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하면서 중동의 개혁 군주로 부상한 무함마드 왕세자는 순식간에 마음만 먹으면 반대 세력을 잔혹하게 제거하는 철권 통치자로 추락했다.

카슈끄지 살해 1년…'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종합)
사건 직후 사우디는 휘청거리는 듯했다.

사건 3주 뒤 사우디에서 열린 국제경제인회의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는 '사막의 다보스 포럼'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초청된 국제적 인사가 줄줄이 불참했다.

한 달 뒤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는 참석한 무함마드 왕세자와 다른 정상이 악수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 될 만큼 사우디의 입지는 궁색해졌다.

난처해진 사우디가 국제사회를 향해 개선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최악의 인도적 위기에 처한 예멘 내전을 해결하려고 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왔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사우디가 지원하는 예멘 정부와 반군이 휴전합의를 성사해 '죽은 카슈끄지가 예멘의 희망을 살렸다'라는 분석도 나왔다.

독일, 덴마크, 핀란드는 사우디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사우디를 가장 압박할 수 있는 미국이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사우디도 자신감을 회복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무함마드 왕세자를 최종 책임자로 지목했는데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사우디는 이란,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미국의 무기를 수십억 달러어치나 샀다"라며 사우디 편에 섰다.

그러면서 "미국은 사우디의 굳건한 협력자로 남을 것이다"라며 "그(무함마드 왕세자)가 그랬을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슈끄지 사건은 서서히 관심에서 멀어졌다.

카슈끄지 사건으로 사우디에 대한 투자가 부진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올해 3월 사우디 국영석유사 아람코는 120억 달러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성황리에 마쳤다.

4월에 리야드에서 개최된 '비전 2030 금융권 국제회의'엔 굵직굵직한 세계 금융회사 최고위 인사가 참석해 사우디의 밝은 미래를 염원했다.

책임자로 의심받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카슈끄지 살해 1년이 다가오자 미국의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과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지난달 29일 방송된 미국 CBS '60분' 인터뷰에서 그는 사우디의 정치지도자로서 책임은 인정하지만 절대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미 PBS와 인터뷰에서도 "모든 책임은 내게 있지만 그 사건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라면서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3인칭 관찰자 시점'을 고수했다.

사건 직후 잠시 활기를 띤 예멘 평화협상도 사우디와 예멘 반군의 불신 속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카슈끄지 사건의 당사국인 터키는 인권의 차원에서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에 이 사건을 이용한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살해 직후 무함마드 왕세자의 직접 관여를 암시하는 기밀 정보를 하나씩 흘리며 사우디 왕실을 곤혹스럽게 했고, 1년이 지났지만 사건의 전말을 명쾌하게 밝혀 종결하는 대신 마치 약점을 쥔 것처럼 사우디와 관계에서 지렛대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터키가 카슈끄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어느 수준까지 공개할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카슈끄지가 속했던 미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를 통해 "논란이 많은 사건이다"라며 "터키는 항상 사우디를 친구이자 동맹국으로 여겼고 살만 사우디 국왕과 그의 충실한 신하들을 흉악한 살해범과 확실히 구분한다"라고 밝혔다.

사우디 왕실을 압박하면서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 전략적인 모호성으로 카슈끄지 사건을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

터키는 사우디와 적대적인 이란, 카타르와도 원만한 관계여서 사우디와 이란 진영으로 양분된 중동에서 국익을 최대한 챙기고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는 곳이다.

사건의 최대 당사국인 사우디, 터키, 미국이 현실적 이해 속에 진상 규명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홀로 남은 그의 연인 젠기즈의 외침은 그래서 더욱더 외롭게 들린다.

그는 카슈끄지 사망 1주기를 맞아 dpa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를 지목하면서 "왜 자말이 죽었는지,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