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앙은행(SBV)의 권능은 무소불위에 가깝다. 한국의 정부 조직에 비춰보자면, 한국은행에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기능을 더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획재정부의 재정정책 총괄하는 곳이 SBV다. 이런 이유로 레 밍 흥(Le Minh Hung) SBV 총재는 당서기를 제외하고, 베트남에서 가장 만나기 힘든 관료로 꼽힌다. 그와 독대하려면 수억달러짜리 투자확약서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헝 총재는 베트남 경제라는 신흥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행보는 베트남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가늠자다.

흥 총재를 비롯해 역대 SBV 총재들은 베트남을 ‘아시아의 신룡(新龍)’으로 키우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렸던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성과에 견줄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잠재력 면에선 베트남은 첫 손에 꼽을만하다. 올해 베트남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0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찍을 전망이다. 미국과의 무역 전쟁으로 중국에 전운이 몰려들면서 심지어 중국 기업들조차 베트남을 새로운 ‘공장 지대’로 택하고 있다. 하노이 인근 박닌, 박장성 등에 산업공단을 조성한 사업자들의 영업이익률은 불과 1년 여만에 1.5~2배로 뛰었다. 2017년 3.3㎡당 95달러 수준이던 공단 분양가가 현재 14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특히 중국 업체들의 ‘베트남 러시’는 거의 ‘묻지마 투자’ 수준이다. 금속 가업공업을 하는 중국기업 A사는 베트남 정부의 환경 규제를 숙지하지 않고 들어왔다가 공단 입주 보증금을 떼일 위기에 처해있다. 법률 대리를 맡은 로펌 관계자는 “오염수 배출 기준조차 알아보지 않고 서둘로 공장을 이전하려다 낭패를 겪고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현지시간) 중국업체 등 베트남으로 생산기지를 옮긴 기업들이 부품 등 협력사를 현지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보복이 만든 기현상이다.

앞으로도 수년 간 지속될 FDI의 꾸준한 유입은 흥 총재의 ‘포지션’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8월말 현재 베트남 정부의 외환보유액은 700억달러에 육박한다. 3~4개월치 무역액에 맞먹는 양이자, 2016년의 두 배 규모다. 이를 바탕으로 SBV는 달러 가치 상승과 위안화 하락이란 이중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동화(VND)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방어해왔다. 올 상반기 베트남 고시환율 변동 수준은 1% 정도였고, 주요 상업은행의 고시 환율과 은행 간 환율 변동폭도 0.3~0.4% 정도에 그쳤다. 환율 안정은 흥 총재와 SBV가 통화정책을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달 23일 SBV는 일일 기준 환율을 달러 당 23,127동으로 설정했다. 1년 전보다 1.98%, 올해 초 이후 1.32% 동화 가치가 절하된 셈이다.

흥 총재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달성한 지금까지의 성공은 ‘균형’이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그의 자전거는 한때 비틀거리는 듯 보였으나, 2014년 경상수지 흑자 전환을 기점으로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해도 외국투자기업들이 들고 온 달러는 각종 기자재와 원자재 구매용으로 다시 해외로 나가곤 했다. 해외 자본투자가 베트남 기업에 대한 지분 매입 등 M&A(인수·합병) 방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급격한 자본유출입에 대한 큰 걱정없이 베트남은 연 7% 내외의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흥 총재의 자전거가 양발로 움직이고 있냐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있다. 베트남은 아직까지 FDI라는 외발 자전거로 움직이는 경제다. 전체 수출에서 FDI 기업의 비중이 약 70%에 달한다. 지난 7월 베트남 정부는 SBV 등 고위 경제관료들이 집결, 1986년 ‘도이모이’ 개혁 이후 경제 성과를 평가를 자리를 가졌다. 이 날 주요 관료들은 이구동성으로 FDI 의존형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베트남의 누적 FDI는 2017년말에 3187억달러에 달했다. 올 상반기엔 3200억달러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라의 총 GDP(국내총생산)가 2017년 2200억달러(최근 수정된 기준으로는 2017년 2750억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FDI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개발도상국이 이처럼 많은 외부 투자를 유치하기는 쉽지 않다. 베트남 정부가 파격적인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며 투자 여건을 조성한 결과다. 한국이 해외 차관에 의존해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은 비교적 낮은 위험을 안고, 성장의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이 두 발 자전거로, 더 나아가 강력한 엔진까지 장착한 자동차로 변신하려면 FDI 의존형 경제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 자본시장에 유입된 외화보다는 덜하긴 하겠지만 FDI 또한 언제든 썰물처럼 빠져나갈 위험이 있다. 흥 총재가 10월1일부터 은행의 장기 달러대출을 금지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베트남의 순국제투자는 여전히 마이너스다.

그럼에도 앞으로 당분간 베트남 경제는 ‘아시아의 빛’이라 불릴 가능성이 높다. 은행 건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줄 바젤Ⅱ, 기업 투명성을 재고할 IFRS 가입 등 베트남 정부가 향후 2~3년 안에 이루기로 한 약속들을 지킨다면 미국 등 서양 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될 수 있다. 흥 총재를 비롯해 베트남 리더들이 향후 5~10년의 골든 타임을 어떤 방향으로 활용하고, 미래를 설계할 지에 베트남의 명운이 달렸다.

하노이=박동휘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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