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jh9947@hankyung.com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jh9947@hankyung.com
“우리는 트렌드와 패션을 완전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닥터마틴은 클래식을 유지하고 모든 것은 거기에서 나온다.”

영국의 신발 브랜드 닥터마틴이 최근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1940년대 전쟁 당시 군화에서 시작된 닥터마틴은 영국에선 스트리트 패션으로 젊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업체다. 세련되지만 가볍지 않은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이 인기 요인이었다. 그러나 딱딱한 착화감과 50년대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디자인에 매일 새롭게 나오는 수많은 신발에 치여 한때 정체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초창기 제화법과 디자인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지키자 클래식한 매력을 찾는 밀레니얼·Z세대(10~30대)의 눈길을 끌게 됐다. 닥터마틴은 2012~2013회계연도에 글로벌 매출이 1억6040만파운드(약 2343억원)였지만, 올해는 1분기 매출만 벌써 4억5330만파운드(약 6619억원)를 찍었다. 지난해 전체 판매량은 전년 대비 20% 늘었다. 지난해 취임한 케니 윌슨 닥터마틴 최고경영자(CEO)의 전략이 ‘제2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케니 윌슨 영국 닥터마틴 CEO "모든 것은 클래식에서 나온다"
동물 가죽 대신 ‘비건 부츠’…수익 급증

윌슨 CEO는 20년 가까이 유럽 유통시장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닥터마틴 CEO로 부임하기 전까진 영국 의류 브랜드 캐스 키드슨의 CEO로 재직했다. 이 기간 판매량을 두 배 이상 늘리고 세계 매장을 220곳까지 확대했다. 닥터마틴 CEO로서 그는 온라인 판매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최근의 매출 증가에 가장 기여한 것도 온라인 판매 급증이 꼽힌다. 세계 시장에서 온라인을 통한 판매가 60%가량 증가해 회사 총 매출의 16%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글로벌 시장으로 넓혀갈 기회가 됐다.

또 윌슨 CEO는 닥터마틴이 가죽 신발 브랜드지만 최근 동물보호, 친환경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흐름에 맞춰 동물성 원단 대신 합성 가죽으로 만든 ‘비건 샌들’을 출시했다. 동물 가죽으로 60년간 신발을 만들어온 브랜드로선 새로운 시도였다.

비건 신발은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끌고 있다. 비건 라인의 판매량은 2018회계연도에 전년 대비 84% 증가했다. 비건 라인의 성공에 힘입어 올 1분기 순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70%나 급증했다. 윌슨 CEO는 “가죽 상단을 합성 폴리우레탄 플라스틱으로 대체한 비건 제품군의 판매량이 최근 몇 년간 수백 퍼센트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제 비건 신발은 닥터마틴 전체 매출의 4%를 차지한다.

새로운 라인을 내놓으면서도 닥터마틴 특유의 감각은 유지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투명한 러버 솔과 노란색 스티치, 그리고 뒤축에 달린 로고 고리는 여전히 닥터마틴임을 드러내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닥터마틴 신발은 60년 가까이 영국 스트리트(길거리) 패션에서 높은 인기를 누려왔지만, 최근 (친환경, 동물 보호 등) 정치적 격변과 유행은 밑창이 두꺼운 이 신발에 다시 전성기를 만들어 기록적인 판매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케니 윌슨 영국 닥터마틴 CEO "모든 것은 클래식에서 나온다"
영국 패션 아이콘으로 ‘우뚝’

닥터마틴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태생의 클라우드 마틴 박사의 손에서 시작됐다. 군의관인 마틴 박사는 당시 다리 부상을 입어 기존 군화가 불편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허버트 펑크 박사와 함께 독일 공군 비행장에서 폐기된 고무를 사용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공기쿠션 밑창을 개발했다. 이 밑창은 탄력이 좋아 근육과 인대를 자극하면서도 관절을 보호했다. 이것이 오늘날 닥터마틴의 러버 솔이다.

이들은 1947년 본격적으로 회사를 설립해 이 발명품을 시장에 내놨다. 러버 솔이 부착된 신발은 근육의 회복을 촉진하면서도 관절을 보호할 수 있어 의료시장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패션이라고 볼 순 없었기 때문에 대중의 눈길을 끌진 못했다.

그러던 중 현재 닥터마틴 소유주인 그릭스그룹의 회장 빌 그릭스가 이들의 에어 쿠션에 관심을 보였고, 특허권을 사들이면서 지금의 닥터마틴에 이르게 됐다. 그릭스 일가는 영국 노샘프턴셔 웰러스턴에서 부츠를 제작해 노동자와 군대에 보급하는 업체였다. 이들은 노랑 웰트 스티치, 투톤을 입힌 에지 아웃 솔에 ‘AirWair with Bouncing Soles’라는 글씨를 넣어 디자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1960년 4월 1일에는 닥터마틴의 대표적 디자인인 나파 가죽의 체리레드 컬러 8홀 부츠가 웰러스턴 공장에서 제작됐다. 이 탄생일을 기념해 제품 이름을 1460부츠로 달았다. 1460부츠는 지금도 닥터마틴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다. 이후 3홀 부츠가 연이어 나왔다. 처음엔 노동자, 경찰, 우체국 직원들이 즐겨 신었지만 점차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졌다.

1970년대엔 영국 펑크록, 뉴웨이브 문화와 맞물려 다문화 스킨헤드들의 인기를 끌었다. 거리문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엔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1990년대부터 전성기를 맞았다. 영국의 자유분방한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유행이 바뀌며 2000년대 들어 매출이 급감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당시엔 영국에서도 공장 한 개만을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지미추, 비비안웨스트우드, 폴스미스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