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1993년 출범 이후 26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영국이 아무런 합의 없이 EU에서 떠나는 ‘노딜 브렉시트’ 공포가 커지고 있는 와중에 이탈리아 정치 혼란이란 대형 악재까지 겹쳤다. 특히 이탈리아는 그간 재정긴축 문제로 EU 집행부와 계속해서 마찰을 빚어 와 정치 불안이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치킨게임 벌이는 EU와 영국

영국 BBC에 따르면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20일(현지시간) 브렉시트 합의안의 핵심 쟁점인 ‘백스톱(backstop·안전장치)’ 폐기 관련 재협상을 하자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제안을 거부했다. 백스톱은 영국이 EU를 떠나더라도 1년 이상 EU의 관세동맹에 잔류토록 해 충격을 줄이는 방안을 가리킨다.

지난달 24일 취임한 존슨 총리는 백스톱이 브렉시트의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투스크 상임의장은 이에 대해 존슨 총리가 대안도 없이 압박한다고 보고 제안이 나온 지 반나절 만에 거절했다. EU와 영국이 이에 대해 10월 말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노딜 브렉시트는 불가피해진다.

영국 정부는 아예 다음달부터 안보 국방 금융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사활이 걸린 일이 아니면 EU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EU 회의에 들어갈 역량을 국내 문제에 쓰겠다는 얘기다. 더불어 10월 31일 EU를 탈퇴하는 순간부터 EU 회원국 간 보장해 온 ‘이동의 자유’도 종료하겠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유럽 언론들은 EU와 영국이 노딜 브렉시트로 상대방의 피해가 더 클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양보를 기다리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극심한 이탈리아의 혼란

EU 위기의 또 다른 뇌관은 이탈리아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이날 사임의 뜻을 밝혔다. 연정의 한 축인 극우정당 동맹 소속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이 지난 8일 반체제 정당인 오성운동과의 연정 붕괴를 선언한 지 12일 만이다. 이로써 작년 6월 출범한 ‘극우 포퓰리즘’ 연정은 1년2개월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돈의 상황으로 빠져들 전망이다. 이탈리아 정부와 EU 간 재정적자를 놓고 갈등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이탈리아의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32%에 이른다. EU 집행위원회 권고 기준인 60%의 두 배가 넘는다. 2011년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던 그리스에 이어 EU에서 두 번째로 높다. 지난해 말 재정지출 확대를 추진한 이탈리아 정부는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EU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문제는 이탈리아의 현 상황이 2011년 유럽 재정위기를 불러왔던 그리스와 닮았다는 점이다. 당시 그리스는 유로존 편입 후 방만한 재정지출을 계기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국가 부도위기를 맞았다. 로이터통신은 “그리스 경제 규모의 10배가 넘는 이탈리아가 위기를 맞으면 유로존과 EU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탈리아 일각에선 유로존에 의무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정부지출 제한에 대한 반감으로 탈퇴 움직임까지 제기되고 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