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북핵 협상에 대해 “시간에 쫓기지 않겠다(time is not of the essence)”며 ‘속도 조절론’을 다시 꺼냈다. 북한이 실무협상 재개의 조건으로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한 데 대한 응수로 해석된다.

북핵 실무협상 늦어지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대북 제재 유지 입장을 재확인했다.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판문점 회동 후 미국 측의 대북 접촉에 진전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들에게 시간과 여유를 주려고 한다”고 밝혔다.

백악관과 국무부의 속도 조절 발언은 북한과의 협상 재개에 앞서 일종의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16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한·미 연합 훈련 중지는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회담에서 직접 공약하고 판문점에서 거듭 확약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을 요구할 때 비난 대상은 주로 한국이었다”며 “이번에 미국을 직접 겨냥했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실무협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한·미 양국은 오늘 8월 ‘19-2 동맹’ 연합위기관리연습(CPX)을 할 예정이다. 대규모 군사훈련이 아니라 일종의 ‘시뮬레이션 훈련’이다. 북한은 이마저도 ‘싱가포르 성명 위반’이라며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쌓여가는 미국의 청구서

7월 중순께로 예고됐던 미·북 실무협상이 늦춰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은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통해 ‘유연한 접근’을 강조하고 있지만, ‘핵동결’이 북핵 협상의 입구라는 원칙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전날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처음엔 없었던 아이디어들을 갖고 (협상)테이블로 오기를 희망한다”고 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 정부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직거래’를 주장하고 있는 터라 실무협상 촉진을 위한 지렛대가 사라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청와대는 일본과의 갈등과 관련해서도 한반도 평화가 진전되면 일본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며 “미·북 협상이 늦어지거나 난관에 봉착한다면 우리 정부는 대일 협상을 위한 중요한 카드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북핵 협상에다 한·일 갈등 중재까지 미국에 대한 외교 의존도가 커지면서 백악관의 ‘대한(對韓) 청구서’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 내정자는 16일 ‘부자동맹’이 방위비를 더 내야 한다고 밝혔다. 올 하반기 중 이뤄질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미국이 공세적으로 나올 것을 예고한 발언이다.

국방부는 올초 미국과 방위비 협상에서 1년짜리 증액안에 합의한 바 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박동휘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