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청구권협정 따른 분쟁처리 절차 밟은 뒤 ICJ 제소 수순 전망
한일 외교관계 냉각 지속…미국의 한미일 공조 약화 우려가 '변수'

작년 10월 한국대법원의 일제 징용피해자 위자료 지급 확정판결 이후 파탄 지경으로 내몰린 한·일 관계를 원만하게 돌려놓을 실마리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대법원판결과 관련해 한국과 일본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주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일본에 처음 제안했으나 단박에 거부당했다.

그간 일본 측은 한국 대법원판결이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놓은 초석의 하나인 1965년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청구권협정) 규정에 배치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사법부 판결에 개입하지 않고, 피해자 중심의 해법을 모색한다는 기조하에 역사문제와 경제·안보문제를 분리해 대응한다는 투트랙 대일 외교 노선을 견지했다.

이에 일본 측은 청구권협정에 규정된 분쟁처리 절차를 밟는 것으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나서 양국 외교 관계는 벼랑 끝 국면으로 치달았다.

출구 안 보이는 '징용소송' 대립…日, 韓 제시 첫 대안 거부
'삼권분립'을 내세우며 말을 아껴오던 한국 정부가 대법원 첫 판결 이후 근 8개월 만에 일본 측을 향해 내민 첫 카드가 당사자 격인 한·일 기업의 출연 재원을 바탕으로 한 위자료 지급 방안이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19일 "일본 측이 이 방안을 수용하면 일본 정부가 요청한 청구권협정 제3조 1항에 따른 협의 절차의 수용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 당국자의 말은 이번 제안에 일본 측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청구권협정에 규정된 3단계 분쟁 해결 절차의 마지막 단계까지 간 것을 첫 단계로 되돌려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청구권협정은 분쟁 해결 3단계 절차로 외교 경로를 통한 협의→양국 직접 지명 위원 중심의 중재위 구성→제3국을 앞세운 중재위 구성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1월 9일 한국에 외교상 협의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지난달 20일 직접 지명을 통한 중재위 설치를 요구했다.

중재위 설치 요구에도 한국 측이 불응하자 일본은 19일 제3국을 앞세운 중재위 구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청구권협정에 규정한 절차를 모두 밟는다는 모습을 대내외에 보여줌으로써 명분을 쌓은 뒤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서 시비를 가려보겠다는 시나리오로 분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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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청구권협정 제2조에 규정된 양국 및 국민(법인 포함) 간의 재산, 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는 문구를 근거로 한국대법원 판결에 대해 국제법정에서 다퉈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피력해 왔다.

일본 정부 당국자가 이날 한국 정부의 제안이 보도되자마자 일축한 것은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는 한일 양국 기업의 출연을 통한 문제 해결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미 3단계로 진입한 분쟁 해결 수단을 1단계로 되돌리지도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어 외무성의 오스가 다케시(大菅岳史) 보도관(대변인)도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제안이 한국의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중재에 응하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공식 밝혔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의 이날 오전 정례브리핑에서도 일본 측 반응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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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달됐다는 한국 측 제안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 스가 장관은 당사자 지명 중재위 구성 요구에 전날(18일) 시한까지 한국이 응하지 않은 것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협정상 의무에 따라 중재에 응하도록 계속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런 일본 정부 내 분위기로 미뤄볼 때 '징용피해자 위자료 판결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은 몰라도 법적인 책임은 없으니 청구권협정을 맺은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유지될 공산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 문제 대응 등에 있어서 한미일 공조가 약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미국이 한일관계 개선을 촉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변수'라는 분석도 있으나, 당장 구체적인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

결국 한국 법원이 일본의 옛 전범 기업에 명령한 징용피해자 위자료 지급 문제는 분쟁 당사자인 한일 양국 정부의 손을 넘어 일본이 의도하는 대로 점점 국제법정 쪽으로 다가서는 형국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