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4개월 아키히토 日王 시대 종료…경제 고난 속 '평화' 남겼다
아키히토(明仁) 제125대 일왕의 퇴위 의식이 30일 열렸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오전 도쿄 궁중 안 3개 신전을 참배하고 퇴위를 고했다. 이어 오후 5시 궁중 안 영빈관에서 퇴위식을 치렀다. 일왕이 생전에 물러나기는 202년 만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하면서 30년4개월간 이어진 일본의 ‘헤이세이(平成) 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날 오전 아키히토 일왕이 조상들에게 퇴위를 고하는 제사 의식에는 1일 일본의 새 일왕이 되는 나루히토 왕세자 등 9명의 왕족이 전통 복장을 하고 참석했다. 퇴위식에는 일본 정부 각료 등 300여 명의 주요 인사가 자리를 지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퇴위식에서 일본 국민을 대표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1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레이와(令和)의 시대’가 평화롭게 결실을 많이 맺기를 바란다”며 “일본인과 세계인의 안녕과 행복을 바란다”고 말했다.

오는 12월 만 86세가 되는 아키히토 일왕은 2016년 8월 고령과 건강 등을 이유로 퇴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생전 퇴위와 관련한 특별법이 제정돼 이날 퇴위식이 치러졌다. 아키히토 일왕은 앞으로 ‘상왕’으로 지위가 바뀌며 왕세자 시절 살던 도쿄 아카사카의 옛 사저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아리가토 헤이세이(고마워요 헤이세이 시대)’(마이니치신문), ‘헤이세이의 그랜드 피날레’(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이날 종막(終幕)을 고한 헤이세이 시대를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되돌아봤다. NHK 등 주요 TV 방송들도 1990~2000년대 초반의 사회상을 되짚어 보는 프로그램을 하루종일 방영했다.

이 같은 일본 언론들의 장밋빛 회상에도 불구하고 헤이세이 시대 30년은 일본사에서 ‘고난의 시절’로 평가된다. 1989년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대 초 일본의 거품 경제가 붕괴됐다. 1989년 12월 29일 38,915.87까지 올랐던 닛케이225지수는 한때 최고치의 4분의 1 이하 수준까지 떨어졌다. 1989년 말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10위에 일본 기업이 8개나 포진했지만 현재는 단 한 개 기업도 포함돼 있지 않다. 샤프, 도시바, 소니 등 글로벌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 기업들이 잇따라 휘청였다.

부동산 가격도 폭락해 2012년 이후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 지가 평균은 거품 경제 시기의 40% 수준에 불과하다. ‘잃어버린 20년’은 이 시기를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고베 대지진(1995년)과 동일본 대지진(2011년) 등 대규모 자연재해도 잇따랐고, 옴 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같은 대형 사고도 터졌다. 일본의 인구 감소가 시작된 것도 헤이세이 시대다.

하지만 이 같은 시련과 즉위 당시 미약했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아키히토 일왕은 꾸준히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상징 일왕’으로서의 새 모델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패전국 왕세자로 40년, 일왕으로 30년간 아버지인 쇼와 일왕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의 상처와 기억을 치유하는 데 전념한 덕분이다. 일본 사회가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는 찬사를 받는 이유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퇴위한 아키히토 일왕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서한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이 재위 기간에 평화의 소중함을 지켜나가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한·일관계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고 전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