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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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이동통신 특허 보유업체 퀄컴은 미국 애플과의 특허, 로열티 지급 등과 관련한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지난 16일 전격 합의했다. 양자 간 합의였지만 시장은 퀄컴의 승리로 판정했다. 퀄컴 시가총액은 이날 하루에만 18조원 불어났다. 뉴욕증시에서 13.27달러(23.2%) 오른 주당 70.45달러로 장을 마감해 19년 만에 최대 하루 상승폭을 기록했다.

이날 애플 주가는 199.25달러로 0.02달러 오르는 데 그쳤다. CNBC는 퀄컴이 86.72달러에 장을 마감한 23일 “애플과의 합의 후 퀄컴 주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며 “퀄컴이 애플에 부품을 공급하게 되면서 5세대(5G) 이동통신 시장의 ‘핵심 조력자’ 지위를 공고히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성공적인 엔지니어 출신 CEO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가 퀄컴의 모뎀칩을 쓰지 못해 5G 경쟁에서 크게 뒤처진 애플이 사실상 꼬리를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 기술 혁신을 이끌어 온 스티브 몰렌코프 퀄컴 최고경영자(CEO)가 주목받은 이유다. 미국 로펌 폴와이스의 스콧 바르쉐이 인수합병(M&A)부문 글로벌책임자는 “몰렌코프는 핵심 기술을 퀄컴이 갖고 있다는 명확한 확신이 있었다”며 “초대형 법정 다툼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라고 평했다.

몰렌코프는 전자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과 미시간대에서 각각 전기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퀄컴에 입사해 실무 개발진부터 차근차근 입지를 다졌다. 2008년 칩 개발 부문 책임자가 됐고 퀄컴 부호분할다중접속(CDMA)기술사업부 부사장직을 거쳐 2011년 퀄컴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냈다. 당시 퀄컴의 칩셋사업을 총괄한 그는 퀄컴의 사업영역을 통신 모뎀 분야에서 컴퓨팅, 그래픽, 멀티미디어 모바일 칩 시장으로 확장했다. CDMA 기술을 확대 적용하고 광대역 CDMA 기술인 W-CDMA를 도입했다. 4G(LTE) 기술 상용화도 주도했다.

몰렌코프는 2011년 당시 무선랜 칩셋 시장점유율 2위 업체인 아테로스를 31억달러에 사들였다. 이 M&A 덕분에 퀄컴은 기존 스마트폰 시장 외에 와이파이 통합 칩 시장으로도 발을 넓혔다. 와이파이 기능을 기존 베이스밴드에 통합해 데이터 사용 기술도 발전시켰다.

뛰어난 실적을 바탕으로 몰렌코프는 2014년 퀄컴 CEO로 올라섰다. 퀄컴 설립자인 어윈 제이컵스, 후계자 폴 제이컵스 전 CEO 이후 처음으로 CEO 자리에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뛰어난 기술적 이해를 바탕으로 경영 감각을 발휘한 게 주효했다는 평이다.

몰렌코프는 지금껏 퀄컴에서 개발해 받은 특허가 38개에 달한다. 전기전자공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학술지에도 꾸준히 기고한다. 톰 호튼 퀄컴 전무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몰렌코프는 확실히 엔지니어 특유의 장점을 많이 지녔다”며 “논리적이며 차분하고, 영리하게 분석한다”고 말했다.

기술력 기반으로 잇단 위기 타개

그가 CEO에 오른 이후 퀄컴은 사방에서 위기를 겪었다. 스마트폰 시장 고성장 시대가 저물고 경쟁사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경영권 공격, 세계 반도체 4위 업체인 브로드컴의 적대적 인수 시도 등이 잇따랐다. 삼성·애플과의 법정 소송도 이어졌다. 퀄컴이 2016년부터 본격 나선 네덜란드 반도체업체 NXP 인수는 막바지 단계에서 중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악재가 겹쳤지만 몰렌코프는 차분히 대응했다. 브로드컴의 공격은 당시 추진 중이던 NXP 인수 추진을 레버리지로 삼아 방어했다. 소송전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애플과 삼성 등은 물론 거대 기업이다. 하지만 우리도 작은 기업이 아니다. 잘 해결되리라 믿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평소 기술력을 높여오면서 갖게 된 독보적인 5G칩 생산력 등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몰렌코프는 올초 퀄컴의 5G 칩을 받지 않기로 한 애플에 대해 “퀄컴의 5G칩은 모두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큰 변화 시기엔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온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세대로 빨리 옮기는 기업이 승리했다”고 언급했다. FT는 이번 소송을 두고 “몰렌코프는 이번에도 공격을 받아넘기며 패기를 증명했다”고 평했다.

미래 먹거리도 발굴

몰렌코프는 스마트폰을 비롯해 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으로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초고속통신망과 연결된 자동차와 의료기 등으로 통신기술 혁신이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CEO는 여러 해가 지난 뒤 회사 입지가 어떻게 될지 고민해야 한다”며 “당장 실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도 8년 후 미래를 위해 지금 ‘베팅’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율주행차와 원격 진료 등에 일찌감치 관심을 가진 이유다.

소송이 끝난 애플과의 협업을 늘리는 등 기존 스마트폰 사업에도 내실을 기할 계획이다. 몰렌코프는 소송 직후 인터뷰에서 “퀄컴에 애플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어 협력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스타트업이라면 투자자들이 새 시도를 하고 성과를 내기까지 5년씩 기다려주지만 대기업은 아니다”며 “기존 분야 입지를 지키고 키우면서 새 먹거리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