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오른쪽)가 1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핵정책 콘퍼런스' 좌담회에서 북핵 협상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주용석 기자
2차 미·북 정상회담 때 실무협상을 이끈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1일(현지시간)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비핵화’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비건 대표는 이날 카네기국제평화기금이 워싱턴DC에서 주최한 ‘핵정책 콘퍼런스’ 좌담회에서 “미국은 ‘북한 비핵화’를 점진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점을 명확히 해왔다”며 “미국 정부는 그 점에서 완전히 통일된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에서 제안한 ‘빅딜(일괄타결)’ 방안이 미 행정부의 공식 입장이란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비건 대표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공개석상에서 대북정책 입장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 국무부 고위당국자도 지난 7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 내 누구도 단계적 접근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영변 핵시설 폐기를 조건으로 2016~2017년 결의된 핵심 유엔제재 5건 해제를 요구하자 “더 크게 가라. 올인하라. 우리는 올인할 준비가 돼 있다”며 영변핵시설을 넘어서는 북한의 비핵화와 제재해제를 맞바꾸는 빅딜 카드를 꺼냈다.

비건 대표도 이날 좌담회에서 비핵화 대상에 대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핵연료 사이클의 모든 영역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북한은 대량살상무기(WMD) 제거를 완전하게 약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WMD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WMD)뿐 아니라 생·화학무기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비건 대표는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면서도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그는 “비핵화 과정은 북한이 먼저 시동을 걸 필요가 있다”며 “압박은 우리가 받고 있는게 아니다”고 했다. 북한이 비핵화 결단을 할 때까지 대북제재는 유지될 것이며, 시간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 편이란 생각을 분명히 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전날 미 언론과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다시 만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북한이 그들의 입장을 재고한 뒤 다시 돌아와 빅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과 이야기하는 건 가능하다”고 말해 빅딜을 조건으로 한 대화 재개 입장을 밝혔다.

반면 북한의 입장은 다르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심야 기자회견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에로의 여정에는 반드시 (영변핵시설 폐기와 제재해제를 맞바꾸는 것과 같은)이러한 첫 단계 공정이 불가피하며 우리가 내놓은 최대한의 방안이 실현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라며 “우리의 이런 원칙적 입장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 미국 측이 협상을 다시 제기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제안한 영변핵시설 폐기와 유엔의 대북제재 5건을 해제하는 과정이 선결돼야 하며 다시 협상이 열리더라도 북한의 입장이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같은 미국과 북한의 입장을 놓고 보면, 미·북 후속 협상은 상당기간 교착국면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비건 대표는 북한의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복구 움직임에 대해선 “북한이 무슨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도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로켓 또는 미사일 시험은 생산적인 조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북한의 의도에 대해 추측을 자제하면서도 북한이 도발할 경우 미·북 관계가 경색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