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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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처럼 가까운 동맹국들을 비판하고 경멸한 미국 지도자는 역사상 없었다. 그러나 유럽이 걱정해야 할 것은 트럼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만이 아니다. 유럽의 가까운 친구들마저 유럽에 대해 점점 낙담하고 있다.

한때 미국 지식인들은 떠오르는 유럽을 향해 찬사를 보내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영향력 있는 잡지인 애틀랜틱에 2002년 실린 한 기사는 미국의 패권에 대항할 도전자는 중국이나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 유럽연합(EU)이라고 주장했다. 애틀랜틱은 EU가 개별 유럽 국가의 자원과 역사적 야망을 축적하고 있는 떠오르는 정치 연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세계 무대에서 새로운 초강대국의 출현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런 평가는 오늘날 유럽이 보이고 있는 모습과는 다르다. 투자의 대가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는 유럽에 매우 관심이 많고 우호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최근 “위협을 인식하지 못하고 상황을 바꾸지 못하면 EU는 1991년 해체된 소련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EU는 점점 커지는 어려움 앞에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다.

쇠퇴가 오늘날 유럽을 덮치고 있는 공포의 실체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다. 통계 수치가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는 미국 달러 기준으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일부 독자들은 유로화 기준으로는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하고 있다며 세계은행 자료를 반박했다. 그러나 유로화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유로존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0.6%에 불과하다. 유로존 경제는 튼튼하지 않다.

이탈리아에선 포퓰리스트들이 정권을 잡았고, 프랑스에선 ‘노란 조끼’ 시위대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개혁 정책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혼란이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때문에 발생했겠는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탈리아 경제 규모는 유로화 기준으로 연평균 0.5%씩 쪼그라들었다. 프랑스 경제는 연평균 0.8% 성장했을 뿐이다.

미국에서 셰일 오일이 생산돼 에너지 가격이 낮게 유지된 덕분에 취약한 유럽 경제가 그나마 버티고 있다. 만약 국제유가가 배럴당 125달러까지 오른다면 유로존과 유럽 은행시스템은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2017년 1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EU의 중요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역에서 미국을 이기려는 것이 EU를 결성한 목적 중 하나였다. 유럽이 갈라지든 통합되든 별로 관심 없다. 내겐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든 유럽의 통합은 미국의 국익에 중요하다. 오직 강한 유럽만이 지역을 안정시키고 이주민과 난민 문제를 인도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다. 러시아를 낮은 비용으로 억제하고 미국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강한 유럽이 있어야 한다. 현 상태의 EU는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EU의 쇠퇴나 해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유럽이 옛 소련처럼 해체되거나 쇠퇴를 거듭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식적인 협력과 성장 친화적인 경제정책에 기반한 활기찬 유럽이 미국의 국익을 증진할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백악관 사이에 오가는 극단적인 언사로는 양측의 이익을 달성할 수 없다.

사면초가에 몰린 유럽은 스스로 개혁하기보다는 안팎의 비판을 방어하기에 바쁘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유럽을 향해 거친 ‘말폭탄’을 던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보다 (극우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한다. 미국과 유럽의 불화는 무익하며 러시아와 중국은 그 갈라진 틈새를 기꺼이 활용할 것이다.

유럽은 국제무대에서 계속 표류하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디차이트의 조세프 조페 편집인은 “소로스의 경고가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EU를 초강대국으로 건설하려는 큰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했다. 세계 정치 차원에서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로스와 조페는 평생토록 유럽의 가치를 지지해 온 사람들이지만 EU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점에 점점 더 공감하고 있다. 유럽은 지속가능한 길을 걷고 있지 않다. 유럽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원제=Europe’s challenge is decline, not Trump

정리=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column of the week] 美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 유럽의 쇠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