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니를 입는 골수 좌파, 캘리포니아 골드(선거자금 잘 모으는 캘리포니아 출신 정치인), 트럼프와 맞짱 뜨는 화끈한 할머니….’

8년 만에 다시 미국 하원 의사봉을 거머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78·민주당)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민주당 원내대표인 펠로시 의원은 3일(현지시간) 개원한 116대 미국 의회에서 하원의원 434명(정원 435명 중 1명은 당선 미확정) 중 220표를 얻어 2006년에 이어 두 번째 하원의장에 올랐다. 하원의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마이크 펜스 부통령(상원의장 겸직)에 이어 미 권력서열 3위다.

펠로시 원내대표의 이날 하원의장 복귀는 아슬아슬했다. 민주당 의원 235명 중 15명이 반대 또는 기권 표를 던진 탓에 찬성표가 과반(219명)을 가까스로 넘겼다.

펠로시는 2002년부터 민주당 원내대표를 맡아왔다. 그의 장기 집권에 대한 당내 피로감이 커진 상황이었다. 신인 정치인을 중심으로 세대교체 목소리가 많았다. 펠로시는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두 가지 승부수를 던졌다. 첫 번째는 ‘임기 제한’ 카드로 하원의장을 4년만 하고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는 트럼프 대통령과 ‘맞짱 뜨기’였다. 지난달 12일 생중계된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이 하이라이트였다. 이날 펠로시는 국경장벽 건설을 고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맞서 “민주당 리더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다”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78세 할머니가 제대로 된 ‘걸 크러시(여성이 봐도 반할 정도의 멋진 여성)’ 이미지를 보여줬다”고 환호했다.

펠로시는 하원의장 선출 직전 방영된 NBC방송 인터뷰에서도 “정치적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해서는 안 되지만, 정치적 이유로 탄핵을 피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각’을 세웠다.
하원의장 선출 직후엔 국경 장벽 예산을 한 푼도 반영하지 않은 예산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펠로시 의장은 미 동부 볼티모어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5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오빠가 대를 이어 볼티모어 시장을 지냈지만 처음부터 정계에 발을 들인 것은 아니었다. 트리니티대를 졸업한 뒤 금융업에 종사하는 남편을 따라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고 아이 다섯을 둔 가정주부로 지냈다.

첫 정치 활동은 36세 때 민주당 주지사의 선거홍보물에 우표를 붙이는 일이었다. 1987년 캘리포니아 제8선거구 보궐선거에서 47세 나이로 처음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승승장구했다. ‘캘리포니아 골드’라고 불릴 만큼 탁월한 선거자금 모금 능력을 발휘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맥을 못 춘 게 펠로시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그는 2001년 하원 원내부대표, 2002년 하원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민주, 공화 양당을 통틀어 첫 여성 원내대표였고 민주당의 ‘간판’이 됐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이듬해 첫 여성 하원의장에 올랐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지만 낙태에 찬성한다. 2008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엔 ‘오바마케어(전국민 건강보험)’ 통과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2007년 하원의장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다.

민주당은 2010년 중간선거에서 패하며 하원의장을 공화당에 내줬다. 하지만 그는 원내대표직을 유지하며 재기를 노렸고 8년 만에 하원 의사봉을 다시 쥐었다.

펠로시의 딸인 다큐멘터리 제작자 알렉산드라 펠로시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내 어머니가 당신의 목을 자르더라도 당신은 피를 흘리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미 언론은 ‘72세 트럼프 대 78세 펠로시’의 승부를 주목하고 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