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이번주 잇달아 열리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신(新)태평양 외교·안보 전략인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구상’과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뼈대로 하는 중국의 아시아 주도권 확보 전략이 정면 충돌할 전망이다.

오는 17~18일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와 13~16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세안 정상회의, EAS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대신 나서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 확충 등을 위한 협력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미국이 아시아 저소득 국가의 인프라 개선을 위해 최대 600억달러(약 67조7400억원)를 지원하되 일본과 호주도 동참시킨다는 계획이다. 지난 7월 내놓은 ‘인도·태평양전략 경제비전’을 구체화한 것이다.

미국은 인도·일본·호주와 함께 역내 항행의 자유, 법의 지배, 공정 무역을 확고히 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차단한다는 구상이다. 미국은 중국이 대규모 자금을 미끼로 주변국들을 일대일로에 참여시킨 뒤 부채를 갚지 못하면 인프라 운영권을 빼앗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중국을 겨냥해 한층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펜스 부통령의 대변인 얼리사 파라는 “펜스 부통령은 권위주의, 침략, 다른 나라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를 미국이 두고 보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 부재를 기회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직접 외교전에 뛰어들어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지역 내 영향력 강화를 노릴 것으로 예상된다. 시 주석은 국제회의 참석 외에 파푸아뉴기니, 브루나이공화국, 필리핀 등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중국은 지역 내 자유무역협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조기 타결에도 공을 들일 전망이다.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이후 중국은 한국과 일본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RCEP를 대안으로 내세워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중국과 외교·안보적으로 대립 관계인 일본도 통상 이슈에선 중국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APEC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 추진을 위한 논의를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언론들은 중국과의 무역전쟁, 동맹국에 대한 관세 부과 등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에 의구심이 커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아세안 정상회의 등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지역 내 영향력을 약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대통령의 APEC·아세안 정상회의 불참은 2013년 이후 처음이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