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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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동부에서 열린, 친구 딸의 견진성사(堅振聖事) 파티에 간 적이 있다. 그 친구의 가족이 타는 볼보와 테슬라 자동차에는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과 맞섰던 진보성향) 버니 샌더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2016년 스티커였고, 다른 하나는 (다음 대선인) 2020년 스티커였다. 내가 “도널드 트럼프는…” 하고 말을 꺼내자 그 친구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는 “모두 나쁜 건 아냐. 맞지? 나는 그(트럼프)가 하는 일 중에서 일부는 좋아해”라며 북한과 보호무역주의를 언급했다. 이리저리 시선을 던지며 누가 엿듣지 않는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내 친구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찍지 않았다. 2020년에도 트럼프를 찍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성향인 그는 내가 예상한 만큼 트럼프를 경멸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 명의 진보성향 친구로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혐오스럽다.” 학계에 있는 한 친구는 미국 국경지대에서 불법 이민자 부모와 자녀를 격리하는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대해 토론할 때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국경을 그냥 열어두는 건 정말 이상하지 않나?”

대선 때 힐러리를 지지한 유권자는 트럼프가 트윗을 날릴 때마다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듯하면서 무신경한 트럼프의 스타일 때문에 말이다. (인종·성·종교·계층집단 등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트럼프의 경멸은 그들을 질리게 만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많은 진보주의자는 경제적·계급적 (상황에 맞는) 정의(正意)에 따라 행동한다. 샌더스 지지자들이 (불법 이민자 부모와 자녀를 떼어놓는) 가족 격리 정책을 옹호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진보성향의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라고 해서 ‘경제적 민족주의’와 ‘더 강한 국경 통제’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건 아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미국 근로자가 최우선이며, 트럼프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국민에게 그 점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준 첫 번째 대통령이다.

샌더스도 그 점을 인정한다.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퇴짜 놓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재협상하겠다고 약속한 걸 샌더스는 칭찬했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트럼프의 관세 부과에 대해선 ‘포괄적이지 않다’고 점잖게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의 일부 외교정책도 칭찬했다. “실질적인 면은 매우 약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은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대처하며 더 평화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긍정적 조치”라고 샌더스는 평가했다. 작년에는 “(트럼프가) 매우 강한 정치적 본능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과 어떻게 접촉하는지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가을 중간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 되고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꺾고 싶어 하는 민주당원 입장에서 볼 때 민주당 지도부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많은 진보주의자가 트럼프를 증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들이 민주당을 찍도록 만들 수 없으며, 그들이 단지 트럼프를 싫어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민주당이 공화당에 맞서 ‘통일 전선’을 구축하고 싶다면 트럼프가 백인 근로자층에서 ‘레이건 민주당원’ 현상을 다시 만들어 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레이건 민주당원은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민주당원을 말한다. 1980년 미 대선 때 민주당원들이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 데서 유래했다). 진보성향 유권자를 (자신들의) 텐트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민주당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분명히 트럼프는 진보주의자들이 선택할 만한 대통령은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샌더스류의 정책을 ‘도용’한 건 묘수일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민주당의 진보성향 정책을 ‘중립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트럼프는 민주당 성향 유권자의 경멸을 덜 받으면서 선거에서 이길 수도 있다.

원제=The Progressives Who Don’t Hate Trump

정리=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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