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승차공유 시장 30조 '질주' … 한국 스타트업은 성장판 닫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태국 방콕 등 동남아시아 주요 도시에서 자주 마주하는 장면 중 하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뒤엉켜 꽉 막힌 도로다. 정부도 이렇다 할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승차공유 기업인 싱가포르의 그랩(Grab), 인도네시아의 고젝(Go-Jek) 등이 새로운 모빌리티(이동성) 혁신에 나서 각광받고 있다. 구글, 소프트뱅크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도 이들 기업에 대거 투자하면서 동남아 승차공유시장이 급성장세를 탔다.

반면 한국은 승차공유 서비스가 규제 족쇄에 걸려 관련 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택시 승차 거부가 여전해 소비자들의 서비스 선택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승차공유로 승차 거부 문제 해결

택시호출 서비스로 출발한 싱가포르의 승차공유 서비스 기업 그랩은 일반 운전자가 제공하는 승차공유, 카풀 서비스 등으로 서비스를 빠르게 확대했다. 승차공유는 동남아의 고질적 사회문제인 교통체증을 해결할 수 있는 묘수로 떠올랐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수를 제한하면서도 모빌리티는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택시의 승차 거부도 승차공유로 해결됐다. 싱가포르에서는 승차공유 서비스로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사이를 오갈 때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교통수단이 제공됐다.

김준성 KOTRA 동남아대양주 지역본부 차장(싱가포르 무역관)은 “싱가포르 정부는 시민들의 불편사항을 받아들여 차량공유 서비스를 규제하기보다 수요 기반형 서비스로 인정해 장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도네시아에선 새로운 서비스에 자극을 받은 택시 회사들이 배차서비스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승객 골라 태우기’가 만연한 한국과는 다르다. 세계 최대 승차공유 서비스 기업인 미국의 우버는 2013년 한국에 진출했으나 택시업계 반발로 2015년 서비스를 중단했다. 택시 승차 거부에 따른 서비스 공급 공백을 메우려고 창업한 콜버스(전세버스 승차공유)와 풀러스(카풀)의 ‘시간 선택제’는 불법이라는 택시업계의 주장에 가로막혀 있다. 당국이 ‘출퇴근’ 개념을 좁게 해석해 평일 아침과 저녁시간에만 카풀이 가능하도록 해서다.

택시호출 서비스를 장악한 카카오는 웃돈을 주면 택시를 더 빠르게 배차해주는 유료화 서비스를 도입하기로 했다. 무료 서비스를 유지한다고 해도 사실상 수수료를 내지 않으면 택시를 못 잡게 되는 것이 아닌지 서비스 출시 전부터 소비자들의 불만이 거세게 일고 있다.

◆우버 제치고 다음은 자율주행

그랩의 동남아시장 점유율은 우버의 3배에 달한다. 시장조사업체 프로스트앤드설리번은 동남아 승차공유 시장이 2021년이면 279억달러(약 30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우버가 동남아 사업 대부분을 그랩에 넘겨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우버와 그랩 모두에 투자한 소프트뱅크도 우버가 아시아 시장에서 출혈경쟁을 멈추고 미국, 유럽, 중남미, 호주 시장에 집중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처럼 우버의 진입을 막지 않아도 운전자 모집, 지도정보 등이 핵심인 승차공유 서비스는 특정 지역에 초점을 맞춘 기업이 현지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우버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중국의 승차공유 기업 디디추싱, 러시아 얀덱스택시와 각각 합작법인을 세우고 지분투자를 하는 형태로 시장진출 전략을 수정했다.

그랩은 지난해 소프트뱅크, 디디추싱, 현대자동차, 도요타자동차 등으로부터 25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해 60억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2022년까지 자율주행 택시를 상용화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자율주행 시대는 반드시 온다”며 “그때 승차공유 서비스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율주행차가 하드웨어라면 승차공유 서비스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는 소프트웨어 구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그랩처럼 대규모 투자를 받은 자율주행 관련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승차공유 서비스가 활성화하지 않고선 이에 기반한 모빌리티 플랫폼이 구축되고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카오택시를 운영하는 카카오모빌리티의 기업가치는 1조6000억원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디지털 경제 ‘첨병’으로

그랩을 통해 모인 240만 명 이상의 운전자는 동남아 지역에서 모바일 결제서비스 ‘그랩페이’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신용카드 결제를 위한 은행 계좌조차 개설하지 않은 이용자들이 현금을 모바일 페이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디지털 경제시스템으로 끌어들이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차량 호출, 승차공유에서 모바일 페이 시장으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연결이 일어나고 있다. 선진국의 O2O(Online to Offline: 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와는 방향이 반대다.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도네시아 기업이 모집한 기사들도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최대 검색엔진인 구글과 중국 최대 인터넷 기업 텐센트가 고젝에 투자하면서 고젝의 기업가치는 30억달러로 뛰어올랐다. 구글, 소프트뱅크, 텐센트, 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업들이 뛰어들어 동남아 페이 시장의 판을 키우고 있다.

‘핀테크(금융기술) 규제 샌드박스’가 모바일 페이 서비스를 빠르게 확대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과 싱가포르 투자청은 핀테크 관련 규제 샌드박스를 만들어 새로운 금융기술·서비스를 규제에 막힘 없이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추가영/박상익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