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히자 중동의 친미(親美) 국가 이스라엘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원전 건설에 나선 사우디는 미국의 ‘우라늄 농축 허용’이라는 카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핵무기 개발 능력이 있는 이란을 견제하는 상황에서 사우디마저 원전을 빌미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면 이스라엘에는 ‘재앙’에 가깝다.

이스라엘은 사우디의 핵무기 개발 전용 가능성을 차단해야 하지만 낙후한 자국 원전산업과 기업을 되살리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중동 내 안보 분야에서 신(新)협력 관계를 구축했던 미국-이스라엘-사우디가 미묘한 갈등 국면으로 빠져드는 양상이다.
200억달러 사우디 원전 수주 다급한 미국… '혈맹' 이스라엘과 틀어지나
◆네타냐후 “우라늄 농축 절대 불가”

7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6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와의 비공개 회의에서 “미국이 사우디 원전 수주 조건으로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를 승인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밥 코커 상원 외교위원장은 “네타냐후 총리는 확실한 반대입장”이라고 말했다. 에드 마키 상원의원도 “그는 중동에서 핵물질과 핵무기가 최소화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유 생산국이지만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2032년까지 원전 16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우선 1400MW급 원자로 2기를 건설하는 200억달러(약 21조4200억원) 규모의 계약을 할 예정이다. 이 사업 수주전에는 미국을 비롯해 한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이 뛰어들었다. 사우디는 오는 4월 2~3개국을 예비사업자로 선정하고 연내 이 중 한 나라와 최종계약할 예정이다. 한국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오는 11~13일 사우디를 방문해 수주전을 벌인다.

◆사우디에는 예외 적용하려는 미국

미국은 그동안 중동지역의 원전 건설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핵무기 전용 위험 때문이었다.

미국 원자력법 123조에 따르면 미국의 원자력 기술을 사용하는 나라가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연료 재처리를 하려면 미 정부와 의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한국형 원전을 짓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는 2009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을 때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연료 재처리를 하지 않고 연료봉도 수입한다는 조건을 수용했다.

한국이나 중국 등에 비해 원자력발전소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미국으로서는 사우디에 우라늄 농축 허용을 공식적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릭 페리 에너지부 장관이 지난해 말 사우디를 방문해 이 같은 내용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지난주에도 사우디와 접촉해 원전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는 일본 도시바를 거쳐 캐나다 투자펀드에 매각됐지만 직원 대다수가 미국인이다. 사우디에서 원전 건설을 수주하는 것은 미국 내 원전산업 부흥을 추진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력적인 기회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 원전에서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연료의 재처리를 허용하면 이는 UAE를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합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원자력산업을 회생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동지역 핵개발 경쟁 우려

이스라엘은 사우디가 UAE처럼 핵무기 개발 여지없이 전력만 생산한다면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다른 나라보다 미국이 사우디에서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이 이스라엘에는 안정적이다. 그러나 농축 우라늄과 재처리된 사용 후 연료는 “언제든지 핵무기 개발에 쓰일 수 있다”며 농축과 재처리 허용을 거부하고 있다.

이슬람교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는 공식적으로 핵무기 개발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하지만 시아파 맹주를 자처하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이란이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춰 이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의 제안을 지렛대 삼아 일정 수준의 우라늄 농축기술을 갖고 싶어한다. 자국에 6만t 규모의 우라늄 원광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도 호재다.

사우디 킹압둘라시티 원자력·신재생에너지원(KA-CARE)의 하심 빈압둘라 야마니 원장은 지난해 10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각료회의에서 “사우디는 핵연료를 자급자족하기 위한 첫 단계로 국내에서 우라늄을 추출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장기적으로 중동의 핵무기 개발 경쟁이 불붙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동 전문가인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이스라엘로서는 사우디가 UAE 방식의 원전을 건설하도록 해 핵무기 개발 여지를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쳐온 미국으로선 경제적 이익 추구를 위해 이스라엘이 반대하는 우라늄 농축까지 고려하는 자가당착적 상황에 놓였다”고 덧붙였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