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다시 ‘냉전의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며 미국에 경고를 날리자 미국 정부는 “우리는 완전히 준비가 돼 있다”고 응수했다.

푸틴 대통령은 1일(현지시간) 의회 국정연설에서 어떤 미사일방어(MD) 시스템도 요격이 불가능한 신형 핵추진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핵태세보고서(NPR)’에서 핵무기 재구축·현대화 방침을 밝힌 지 한 달 만이다. 이번 연설이 미국과 러시아 간 신형 무기 개발 경쟁에 불을 붙였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우회하는 러시아의 신형 미사일 ‘사르마트’ 조종 시뮬레이션.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우회하는 러시아의 신형 미사일 ‘사르마트’ 조종 시뮬레이션.
◆“국내 유권자 겨냥용 연설”

푸틴 대통령은 작심한 듯 미국을 겨냥한 발언을 쏟아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TV로 생중계된 국정연설에서 미국이 1972년 옛 소련과 체결했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 조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자국과 외국에 MD 시스템을 구축한 데 대한 대응으로 첨단 전략무기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개발한 차세대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사르마트’를 소개하며 “첨단 MD 회피 시스템을 장착하고 남극과 북극 방향 모두로 발사할 수 있는 이 미사일은 어떤 MD로도 요격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형 핵추진 엔진을 장착한 순항 핵미사일과 역시 핵추진 엔진을 장착한 무인 수중드론도 개발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신형 무기 개발로 미국이 이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MD가 무용지물이 됐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오는 18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내 유권자들을 겨냥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핵무기 경쟁에 관한 한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메시지를 미국과 NATO 동맹국에 보낸 것이라고 FT는 전했다. 미국도 오는 11월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어 푸틴 대통령의 일방적인 신무기 과시를 좌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 일각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이 같은 ‘전쟁 도발’로 국내 경제 침체에 대한 비판을 모면하려 한다는 비판도 일었다. 최근 국제 유가 반등으로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고 있지만 국제 유가가 폭락한 2015~2016년 러시아는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글로벌 군비경쟁 촉발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전략미사일군 사령관 세르게이 카라카예프는 푸틴 대통령의 국정연설 뒤 언론 인터뷰에서 자국 군수산업체들이 사르마트 생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는 “기업 연합체가 미사일 부품 생산에 들어갔다”며 “미사일 부품 시험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게 100t, 최대 사거리 1만8000㎞에 이르는 사르마트는 개별 조종이 가능한 메가톤급 탄두 최대 15개를 탑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푸틴의 도발에 즉각 반발했다. 헤더 노어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이전에 부인했던 것을 확인해줬다”고 말했다.

양국은 세계 핵탄두의 90%가량을 보유 중이다. 핵탄두 보유량은 대략적으로 균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양국 모두 최근 핵무기 증량 및 현대화 방침을 밝혔다.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강행하고 이란과 주요국들이 체결한 핵동결 합의가 파기될 위기에 처한 국제사회에서 미·러 간 핵무기 경쟁까지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의 베아트리스 핀 사무총장은 “우리는 신(新)냉전의 두려움과 언제든 바로 죽을 수도 있다는 지속적인 공포로 우리를 몰아넣을 새로운 무기경쟁 속에 있다”고 말했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