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때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뒤에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앉아 있다.  /한경DB
지난 9일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때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뒤에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앉아 있다. /한경DB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만날 계획이었지만 회담 2시간 전에 취소됐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 미 언론들이 21일 보도했다.

WP는 “평창 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던 펜스 부통령이 김여정,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지난 10일 회담을 할 계획이었으나 회담 2시간 전 북측에서 이를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펜스 부통령이 방한 후 탈북자 면담과 북한 인권상황을 규탄하는 등 대북 강경자세를 지속하자 북한이 갑자기 취소통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펜스-김여정 '청와대 비밀회동' 2시간전 북한 취소로 무산
방한 2주 전 북한과 접촉 논의

WP는 백악관 관계자들을 인용해 북측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방한 중 만남을 원한다는 얘기를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전해 듣고 펜스 부통령 방한 2주 전부터 북한과 접촉 논의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접촉 방법은 한국 정부가 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주재로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북측의 회담 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는 펜스 부통령을 비롯해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참석했다. 마이크 폼페오 CIA 국장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도 논의 과정에 참여했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측과의 접촉을 통해) 우리 정책이 무엇인지 이해시키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회담 장소와 방법 등 구체적 내용이 확정된 것은 펜스 부통령이 지난 8일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北, 펜스 부통령 행보에 부담

미국과 북한은 올림픽 개막식 이튿날인 지난 10일 오후 청와대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회담에는 미국 측에서 펜스 부통령, 닉 아이어스 부통령 비서실장 등이 참석하기로 했다. 북측에서는 김여정과 김영남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회담은 만남 두 시간 전 북측에서 취소 통보를 해오면서 불발됐다.

WP는 펜스 부통령이 지난 9일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하고,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제재 전개 등 압박 캠페인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나온 시점에 회담이 취소됐다고 전했다. 펜스 부통령은 이날 저녁에도 평창 리셉션 행사장에서 문재인 대통령,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기념사진 촬영을 한 뒤 바로 퇴장했다.

아이어스 비서실장은 “북한은 펜스 부통령으로부터 부드러운 대북 메시지를 바라며 회담에 매달렸다”며 “이를 통해 올림픽 기간 그들의 선전에 국제무대를 활용하려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북한의 평화공세에 끌려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고 북한도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판단 아래 접은 것 같다는 해석이다.

워싱턴 외교가는 펜스 부통령이 귀국한 뒤 한참 지나 이 같은 전후 사정을 흘린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펜스 부통령은 평창올림픽 개회식 남북 단일팀 입장 때 기립을 거부하는 등의 행보로 대국(大國) 지도자답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北 비핵화 의지가 관건

당시 펜스 부통령의 한국 행보를 놓고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제재와 선제공격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올림픽에 배치했다. 바로 자신의 여동생 김여정이다”(블룸버그통신), “북한은 이미 올림픽에서 승리를 거뒀다. 스포츠 부문이 아니라 홍보 금메달을 땄다”(CNN), “김 위원장의 여동생이 매력을 발휘해 펜스 부통령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챘다”(뉴욕타임스) 등의 보도가 이어졌다.

결국 국내적으로는 북한이 올림픽을 통해 어떤 평화공세를 꾸몄는지를 속시원히 공개함으로써 여론의 예봉을 피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비핵화 의지 없는 대화로는 제재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조미현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