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소비재 기업인 미국의 프록터앤드갬블(P&G)과 행동주의 투자자 넬슨 펠츠 간 ‘위임장 전쟁(proxy war)’이 펠츠의 역전승으로 끝날 전망이다. 양측은 지난 10월 주주총회 표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6000만달러(약 663억원) 넘게 쏟아부었다. ‘세기의 대결’로 불린 이유다.

이에 따라 펠츠가 이끄는 헤지펀드 트라이언파트너스는 제너럴일렉트릭(GE)에 이어 P&G 이사회에 참여하게 됐다. 다우듀폰과의 대결에서도 분사 계획을 관철한 바 있어 미국 대기업들의 ‘저승사자’로 불릴 만하다.
'행동주의 투자자' 펠츠, 6000만달러 위임장 대결서 P&G에 역전승
◆재검표로 한 달 만에 뒤집힌 승부

작년 말부터 35억달러를 투자해 P&G 지분 1.5%를 확보한 트라이언은 올 2월 “P&G가 제대로 매출과 이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며 사업 분할과 펠츠 회장의 이사 선임을 요구했다. P&G는 “펠츠는 한 번도 획기적이거나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를 제안한 적이 없다”며 단칼에 거부했다.

양측은 팽팽히 맞서다가 지난달 10일 연례 주주총회에서 승부를 가렸다. P&G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에 속한 기업 중 소액주주(40% 수준)가 많은 기업이어서 우군 확보가 필요했다. 양측은 250만 명에 이르는 개인 주주를 대상으로 득표전에 나서 6000만달러(트라이언 2500만달러, P&G 3500만달러) 이상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 11명을 뽑는데 전체 발행주식 26억 주 중 20억 주가 권리를 행사했다. P&G는 표결 직후 예비집계 결과 기존 이사 11명이 모두 재선임되고 펠츠는 1% 미만 차이로 낙선(12위)했다고 발표했다. 펠츠 측은 “최종 결과가 나와야 한다”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자투표가 대다수였지만 서면 투표 결과는 수작업으로 재검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독립 감사회사인 IVS어소시에이츠에 맡겨 재검표를 했고, 그 결과 한 달여 만인 15일 승부가 뒤집혔다. 펠츠는 9억7195만3651표를 얻어 P&G가 내세운 11명의 이사 후보자 중 최저 득표자인 에르네스토 세디요 전 멕시코 대통령(9억7191만871표)을 앞섰다. 두 사람의 표차는 4만2780표(전체 발행주식의 0.0016%)에 불과했다.

이번엔 P&G가 재검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다”며 “이의 신청과 재검토를 거쳐 양측이 다시 결과를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억 표나 되는 만큼 각 주주가 투표권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서명을 똑바로 했는지, 한 번 이상 투표하지 않았는지 등을 다시 확인하겠다고 했다.

트라이언 측은 성명에서 “P&G가 더 이상 시간과 주주들의 돈을 낭비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IVS는 통상 1주일이면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개표 집계에 한 달이나 걸린 건 신중히 작업했다는 걸 보여준다며 펠츠가 P&G 이사회에 입성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P&G 사업 전략 대폭 바뀔 듯

펠츠는 칼 아이칸, 폴 엘리엇 등과 함께 월가의 대표적인 행동주의 투자자다. 최근 미국 대표기업의 경영에 속속 개입하거나 간섭하고 있다. 트라이언파트너스를 앞세워 GE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뒤 실적 부진을 이유로 제프리 이멜트 최고경영자(CEO)를 퇴진시켰다. 지난달엔 에드 가든 트라이언 최고투자책임자(CIO)를 GE 이사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다우듀폰에서도 입지를 확보했다. 2013년 듀폰의 주주가 된 트라이언은 분사를 요구하며 2015년 회사 측과 주총 표대결을 벌였다. 듀폰이 이겼지만 이는 다우와의 ‘세기의 합병’ 계기가 됐다. 또 다른 행동주의 헤지펀드 서드포인트로부터 공격받던 다우와 듀폰은 고심 끝에 회사를 합병한 뒤 △농업 △소재 △특수화학 등 세 개 회사로 나누기로 했다. 트라이언은 지난 9월 분사될 소재회사가 너무 많은 사업을 관할한다며 재검토를 주장해 다우듀폰이 이를 전폭 수용했다.

이런 전적의 펠츠가 180년 전통의 P&G 이사회에 진출하면 P&G의 사업 전략이 대폭 바뀔 가능성이 높다. P&G는 질레트, 타이드, 위스퍼 등 글로벌 ‘빅 브랜드’를 대거 보유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주가 상승률이 벤치마크인 S&P500지수뿐 아니라 소비재업종지수에도 크게 못 미쳐 눈총을 받아 왔다.

펠츠 회장은 “P&G가 과거 성공에 매몰돼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회사를 다섯 개로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G 측은 “새 세대가 등장했다고 빅 브랜드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