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반대파 숙청’ 작업으로 사우디뿐만 아니라 걸프협력기구(GCC) 증시가 시험대에 올랐다. 월가는 이번 사태가 사우디의 탈(脫)석유화 개혁에 탄력이 될지, 아니면 사우디 정치 불안과 앙숙 이란과의 충돌로 번질지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사우디 채권과 주식 가격이 급락하자 시장은 우려를 나타냈다. 올해 중동 국가의 국채 발행 규모가 사상 최고치로 불어나면서 채권시장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사우디 '반부패 숙청' 후폭풍… 중동지역 주식·채권시장 강타
◆걸프국 증시에도 불똥

사우디 주식시장의 타다울종합주가지수(TASI)는 7일(현지시간) 3.1% 하락하며 1년 중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전날 빈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반부패위원회가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 등 수십 명의 왕족과 전현직 장관을 반부패 혐의로 체포한 영향이다. 글로벌 큰손 투자자로 알려진 빈탈랄이 설립한 킹덤홀딩스는 이날 10% 이상 떨어지며 전체 주가지수를 끌어내렸다.

걸프국 증시에도 불똥이 튀었다. 쿠웨이트 증시(KWSE)는 이날 2.8% 급락하며 지난 5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두바이(-1.8%) 카타르(-1.1%) 바레인(-1%) 증시도 일제히 하락했다.

투자자들이 더 주목하는 것은 채권시장이다. 2026년 10월 만기가 도래하는 사우디 국채 가격이 급락하며, 이날 채권수익률은 5월 이후 최고 수준인 연 3.53%로 치솟았다. 채권 가격과 수익률(금리)은 반대로 움직인다. JP모간이 운용하는 사우디 회사채지수 수익률은 전날 연 4.517%까지 치솟으며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불안을 키우는 것은 저유가 영향으로 지난 2년간 급격히 늘어난 중동 국가의 채권 발행 규모다. 사우디를 비롯한 쿠웨이트 오만 아부다비 요르단 이라크 바레인 등이 올해 채권시장을 통해 빌린 자금은 600억달러(약 66조9000억원) 규모로 사상 최대다. 사우디가 9월 신흥국 사상 최대 규모(125억달러)의 달러표시 채권을 발행하면서 지난해 발행액(420억달러)을 넘어섰다.

익명을 요구한 한 펀드매니저는 파이낸셜타임스에 “글로벌 양적완화(QE)에 취한 투자자들이 수익률에 눈이 멀어 중동 채권에 투자했다”고 우려했다.

◆빈살만의 개혁이냐, 정치 불안이냐

빈살만 왕세자의 반대파 숙청 작업을 그가 주도하는 개혁 정책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빈살만 왕세자는 지난달 24일 월가 구루들을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 불러 모은 자리에서 5000억달러(약 564조원) 규모의 네옴 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그가 추진하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기업공개(IPO)도 ‘이상무(無)’라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우디가 부패 청산을 앞세워 체포한 왕족과 기업인들의 개인 계좌에 축적된 8000억달러(약 891조원) 상당의 자산을 몰수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얀 덴 애시모어그룹 리서치대표는 “사우디 숙청 사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를 숙청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며 “빈살만 왕세자가 권력을 강화하고 사우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행보”라고 말했다.

채권수익률 상승이 투자 기회라는 시각도 많다. 영국 애버딘스탠더드인베스트먼트의 키에란 커티스 펀드매니저는 “사우디 10년물 수익률은 신용등급이 더 낮은 필리핀 국채에 비해 0.5%포인트 이상 높기 때문에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국제 유가는 차익 실현 매물에 후퇴

시장 전문가들은 빈살만 왕세자의 권력 강화를 사우디의 ‘유가 지지 정책’으로 보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 간 긴장 고조는 유가를 부양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가 상승세와 지정학적 불안 고조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감산 연장 합의를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유가를 압박하는 식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전날 2년 반 만에 최고점인 배럴당 64달러대를 찍었던 국제 유가는 이날 고점에서 후퇴했다. 유가 상승으로 차익 실현 매물이 나와서다.

유럽의 원유 탐사 및 생산 회사들은 유가 상승에 부채 부담을 덜어냈다. 영국 런던증시에서 FTSE석유가스생산자지수는 1년 전보다 20%가량 상승하며 FTSE전종목지수 상승폭을 5포인트 이상 추월했다. 이런 가운데 OPEC은 ‘2017년 세계석유전망보고서’를 내고 전기차 시장이 본격화하는 2030년 전까지는 원유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