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완화 연장하되 규모 줄여…"매파와의 타협…비둘기적 테이퍼링"

양적완화 기한을 연장하되 규모는 줄인 유럽중앙은행(ECB)의 결정이 양적완화(QE) 축소(테이퍼링)의 시작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국제금융시장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이번 결정이 양적 완화 확대이며 테이퍼링은 의제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지만, 시장에서는 이를 테이퍼링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 전했다.

ECB는 전날 내년 3월 종료되는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내년 말까지 9개월 연장하되, 자산매입 규모는 현행 월 800억 유로에서 내년 4월부터 월 600억 유로로 축소하기로 했다.

ECB는 작년 3월부터 월 600억 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시행해오다가 올해 4월부터 월 800억 유로로 규모로 확대했다.

전날 ECB의 통화정책회의 직후 이런 결과가 알려지자 외환시장에서 유로화 가치는 유로당 1.0872달러까지 1% 급등했다.

하지만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드라기 총재가 "ECB는 테이퍼링을 하는 것이 아니다.

테이퍼링은 의제로 논의되지 않았다"며 진화에 나서자 유로화 가치는 다시 유로당 1.061달러로 떨어졌다.

유럽 각국의 국채금리는 상승했다.

특히 포르투갈과 같이 투자자들의 우려가 집중되는 지역의 금리 상승 폭이 컸다.

다만, ECB가 초저금리 채권을 매입하는 데 대한 제한을 줄이기로 했다는 소식에 단기국채 금리는 하락했다.

국제금융시장의 즉각적 출렁거림은 진정됐지만, 앞으로 2013년 벤 버냉키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돈줄 죄기를 시사하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긴축발작(테이퍼 탠트럼)이 나타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ING의 카르스텐 브르제스키는 "ECB의 이번 결정은 양적완화를 중단하거나 적어도 줄이라는 ECB 매파(통화긴축 선호)의 압박이 커진 데 따른 타협의 산물"이라며 "현명한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테이퍼 탠트럼으로 끝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즈호은행의 피터 채트웰은 "ECB가 양적완화 규모를 내년 4월부터 줄이면서 내년 양적완화 규모는 투자자들이 기대한 것보다 1천억 유로 줄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ADM의 마르크 오스트월드는 "이번 결정은 비둘기(통화완화 선호)적인 테이퍼링"이라며 "ECB는 분명히 추가 양적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BNP파리바의 리처드 바웰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결정은 테이퍼링의 나이키버전"이라며 "(나이키의 광고문구 처럼) '말하지 말고 그냥 하라(Don't say it. Just do it)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사실상 테이퍼링이 아니라는 반론도 없지는 않았다.

에르메스자산운용의 닐 윌리엄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테이퍼링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기한연장에 따른 추가적 양적완화 규모는 그리스나 포르투갈의 국내총생산(GDP) 규모에 육박한다"면서 "이것은 추가적 양적완화지 양적완화를 줄이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FT는 이날 사설에서 드라기가 갈수록 '가는 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며 ECB의 이번 결정은 독일 등 양적완화에 비판적인 매파를 달래는 동시에 독일 대선 전에 어려운 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으로는 이점이 많은 선택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FT는 "드라기는 이번 결정이 테이퍼링이 아니라고 진화했지만, 이는 분명히 부양책의 수준을 줄이는 것"이라며 "유럽경제의 회복세가 미약한 상황에서 출구전략을 너무 일찍 가동해 2008년이나 2011년 금리를 인상하는 것 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이 율 기자 yulsi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