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규제·간섭 싫다"…'이텍시트' 내걸고 급부상한 반기성정치 정당
“유럽연합(EU) 장관들이 우리를 팔아넘겼다.” 이탈리아 남부 해안도시 팔레르모에서 레몬 농사를 짓는 안드레아 미네오는 지난 4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스와의 인터뷰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시내 어느 슈퍼마켓을 가든 남아공산(産) 레몬이 가득한데 이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에서 ‘반대’에 표를 던졌다. 인디펜던스는 “이웃 마을인 테르미니 이메레세는 피아트자동차 공장이 유럽 발칸지역으로 빠져나간 뒤 황무지처럼 변했다”고 보도했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총리직을 내걸었던 이번 국민투표 부결은 단순한 헌법 개정 거부가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오랜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 반사이익은 제1야당 ‘오성운동(Five Star Movement)’에 돌아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국민투표 부결의 가장 큰 승자는 오성운동”이라고 평가했다. “기득권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EU 탈퇴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세를 불리며 내년 차기 총선에서 집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전했다.

◆2009년 창당, 지지율 30%

오성운동은 정치풍자 코미디언이던 베페 그릴로와 인터넷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고(故) 지안로베르토 카사레지오가 2009년 창당했다. 그릴로는 잘나가는 코미디언이었다. 1980년대 중반 TV에서 고정 프로그램을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인의 특권과 부패상을 고발하는 풍자 코미디 덕분이었다.

하지만 정치권에 밉보인 그는 더 이상 TV에 출연할 수 없게 됐다. 그 대신 TV 밖 무대에서 공연하며 정치풍자를 이어갔다. 2005년 카사레지오를 만나 인터넷에 자기 이름을 딴 블로그를 열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릴로는 욕설을 섞어가며 통렬하게 정치 비판을 했다. 기성 정치에 분노하던 사람들은 통쾌함을 느꼈다. 점점 많은 사람이 그의 블로그를 찾으면서 그의 영향력도 확대됐다. 그릴로 블로그는 2008년 영국 가디언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블로그’ 9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오성운동은 창당 4년 만인 2013년 총선에서 집권 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2당으로 올라섰다. 올 6월에는 로마와 토리노 등에서 시장을 배출했다. 10월 기준 정당 지지율은 29.9%로 민주당(31.0%)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EU 탈퇴·부패 정치인 출마 금지”

오성운동은 이탈리아 국민의 좌절과 분노를 파고들었다. 기든 래크먼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탈리아는 산업 생산 기반의 최소 25%를 잃었고, 청년실업률은 40%에 육박한다”며 “그런데도 EU 규제와 유로화 사용으로 재정 및 통화정책이 제한을 받아 경기부양책을 마음껏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1957년 EU 창립 멤버였고 열렬한 유럽 통합주의자였던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反)EU 정서가 커지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부실은행 구제도 EU 규제로 제약을 받아 해결이 지연되고 있다.

오성운동은 집권하면 EU에서 탈퇴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겠다고 약속했다. 또 국회의원 3선 금지, 의원 수 축소, 부패정치인 출마 금지, 주 20시간 노동, 조건 없는 기본소득 보장 등을 내세워 청년층의 호응을 얻고 있다.

◆젊은 층 “기성 정치권에 환멸 느껴”

로마시내에서 일하는 20대 청년 도메니코는 “개혁총리라고 했지만 렌치는 2년 반이 넘도록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다”고 지적했다. “명품업체 사장이나 부유한 은행가들과 어울려 다니고 백악관에 불려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국빈 만찬을 하는 모습에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박탈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한 달에 1000유로(약 125만원)를 받는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대다수 젊은이에게 렌치의 이미지는 이미 ‘이질감 느껴지는 기득권’으로 고정됐다는 것이다.

다만 오성운동이 집권하더라도 EU 탈퇴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탈리아 헌법에 따르면 국제조약과 관련한 사안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없다. 오성운동이 EU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 탈퇴하려면 우선 이 헌법 조항을 개정해야 하는데 상원과 하원에서 모두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