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진흙탕 같은 대통령선거 정국에 빠져든 가운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신(新)밀월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일본은 경제협력을 ‘당근’으로 제시하면서 러시아와 쿠릴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 문제를 포함한 평화조약 체결을 시도하고 있다. 러시아는 자원 개발과 경제 부흥을 위해 일본의 파격적인 지원을 바라고 있다.
푸틴·아베 '경제 빅딜'로 장기집권 의기투합
◆전방위로 확산하는 러·일 경제협력

1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러시아 최대 민간 가스업체인 노바테크가 북극해에서 추진하고 있는 총 사업비 4조엔(약 43조원) 규모의 대규모 가스전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러시아 정부는 전체 사업비 중 49%를 외국 자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앞서 러시아 정부는 현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된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일본 홋카이도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일본 정부에 제안했다. 오는 12월 일본 야마구치에서 열리는 양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논의 중인 경제협력사업의 일환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5월 러시아 소치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나 8개 분야 경제협력 방안을 제시했다. 당초 대(對)러 경제협력사업 규모는 1조엔(약 10조8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알려졌다. 액화천연가스(LNG) 플랜트 건설 등 에너지 개발을 포함해 극동지역 항만·공항, 병원 건설 등이 주된 내용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경제협력을 내걸고 쿠릴 4개섬 반환을 주내용으로 하는 평화조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정상 사이에 열린 포츠담회담에 따라 러시아가 점령 중인 쿠릴의 시코탄, 하보마이, 에토로후, 구나시리 등 4개 섬의 일부나 전체를 일본이 넘겨받는 내용이다.

◆아베 총리의 패전국 멍에 벗기 외교

아베 총리가 러·일 정상회담에서 얻어내려고 하는 쿠릴 4개섬 반환은 그의 숙원 중 하나다. 쿠릴 4개섬을 돌려받고 ‘전쟁 가능한 일본’으로 헌법까지 고치면 세계 2차대전 패전국의 멍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베 총리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전후 70년이 지났는데도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한 이상한 상황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며 쿠릴 4개섬 반환에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사전에 미국의 이해도 구했다. 일본 정부는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직후 미국 정부 대(對)러 제재와 쿠릴 4개섬 반환 협상을 분리해 대응할 것이라는 의사를 미국 측에 전달했다. 러·일 관계 진전이 동북아시아 안전보장 환경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명분을 세웠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북방영토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고 싶다”며 “푸틴 대통령과 이야기하는 것밖에는 해결 방안이 없다”고 말했다. 러·일 정상회담은 11월 미국 대선이 끝난 뒤 정권 이양기인 12월15일 열린다.

◆장기집권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져

아베 총리와 푸틴 대통령 사이에 갑작스레 온기가 돌고 있는 것은 장기집권을 노리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베 총리는 북방영토 문제를 해결해 외교 성과로 삼으려는 심산이다. 과거 어느 정부도 타개하지 못한 영토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차기 과제인 ‘개헌몰이’에 나설 수 있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아베 총리가 외교적 성과를 기반으로 내년 1월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확산되고 있다. 2018년 대선을 앞둔 푸틴 대통령 역시 장기집권을 하려면 경기침체 탈피가 최대 과제라는 점에서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시급할 것이라고 외교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