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상·하원 선거·테러 불안 의식해 "사우디와 갈등·미국 이익 침해" 우려 무시
오바마정권 첫 거부권 무력화…레임덕 가속화·대선 파장 관측도
백악관 "상원 표결 1983년 레이건 정권이래 가장 당혹" 책임 촉구


미국의 9·11 테러 희생자 유가족이 테러 연루 의혹을 받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9·11 소송법'에 대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이 28일(현지시간) 의회에서 전격 뒤집혔다.

미 상원과 하원은 이날 재심의 표결에서 각각 97 대 1과 348 대 77의 압도적 표차로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기각했다.

이에 따라 미 본토를 겨냥한 테러로 미국인이 사망한 사건에 한해 테러 피해자들이 책임있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이 법안은 입법화됐다.

그 경우 테러자금 지원설 등 9·11 테러 연루 의혹이 제기된 사우디 정부를 상대로 희생자 유가족이 미 법정에서 소송할 수 있게 된다.

'9·11 소송법'의 공식 명칭은 '테러 행위의 지원국들에 맞서는 정의'다.

오바마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이 의회에서 무력화된 것은 집권 후 처음으로, 내년 1월 퇴임하는 그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상·하 양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이날 '힘'을 행사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소속한 민주당의 다수도 가세함에 따라 오바마 대통령의 레임덕이 빨라지고 대선 레이스에 파장을 던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AP통신은 "오바마와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이 법안이 국외 주둔 미군 등을 위험에 빠뜨리는 등 미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처리로 입법화됐다"고 지적했다.

상·하원이 압도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은 것은 오는 11월 8일 대선과 함께 열리는 의회 선거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뉴욕과 미네소타, 플로리다 주 등에서의 잇단 테러 관련 사건 이후 유권자들이 과격한 이슬람 테러리즘을 우려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이 법안이 미국의 이익을 해친다"며 지난 5월 상원, 지난 9일 하원을 각각 만장일치로 통과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우디와의 외교 마찰은 물론 외국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 유사 법안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또 27일 상원 1인자인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와,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에게 "9·11 테러 희생자 가족을 돕는데 전폭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그는 서한에서 "그 법은 테러 공격으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할 수 없을뿐 아니라 그러한 테러에 대한 대응의 효율성을 개선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상원에서는 유일하게 리드 원내대표만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지지했다.

이 법안의 발의자인 존 코닌(공화·텍사스) 상원의원은 이날 표결에 앞서 "민주, 공화당 상·하원 의원들은 모두 테러리즘 지원에 반대하는 이 법안에 동의한다"며 "이 법안은 우리나라에서 테러 희생자들이 받을 자격이 있는 정의를 추구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상원이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기각한 뒤 기자들과 만나 "이 표결은 상원이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한 이래 가장 당혹스러운 일"이라며 "의원들은 오늘 행동에 대해 자신의 양심과 지역구민들에게 답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sh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