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 노리는 제1야당 오성운동도 신뢰도 타격…집권당 '쾌재'

작년 6월 이탈리아 로마 역사상 최초의 여성 시장이자 역대 최연소 시장으로 당선되며 파란을 일으킨 비르지니아 라지(38) 로마 시장이 취임 2개월 여 만에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지난 주 시청 주요 인사 5명이 하루 새 줄사퇴한 것을 계기로 로마시의 인사 난맥상과 행정력 부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데 이어 라지 시장이 시민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사실까지 새롭게 밝혀지며 그는 도덕성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8일 이탈리아 주요 언론은 혼란에 빠진 로마 시정과 라지 시장의 소속 정당인 포퓰리즘 성향의 이탈리아 제1야당 오성운동의 내홍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라지 시장은 지난 5일 로마시 산하 도시폐기물관리공사(AMA) 수사와 관련한 시의회 청문회에 출석, 로마시의 고질적인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임명한 파올라 무라로 환경국장이 직권 남용과 부패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7월부터 알았다고 밝혔다.

라지 시장은 그동안 무라로 국장이 수사 선상에 올랐다는 것을 줄곧 부인해온 터라 이날 청문회가 끝나고 그는 곧바로 거짓말로 시민들을 기만했다는 혹독한 비난에 직면했다.

AMA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던 2004∼2016년 총 113만 유로(약 14억원)의 거액의 급료를 챙겨 논란을 빚어온 무라로 국장은 지난 4월부터 직권 남용과 사기 혐의 등으로 수사 당국의 조사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라지 시장뿐 아니라 오성운동의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루이지 디 마이오(30) 이탈리아 하원 부대표 등 일부 수뇌부도 무라로 국장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라지 시장의 보고 등으로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를 부인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들의 거짓말은 투명성과 정직을 기치로 한 오성운동의 신뢰도에 큰 흠집을 내며 지난 6월 지방선거 이후 두드러진 오성운동의 지지율 상승세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가운데 오성운동 지도부는 라지 시장에게 무라로를 비롯한 부적격 인사를 내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라지 시장은 "무라로의 거취는 언론이나 정당이 아닌 수사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그를 계속 감싸며 인사 문제는 오성운동 당내 내홍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모양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의식한 듯 오성운동의 창시자인 베페 그릴로는 지난 7일 라지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로마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오성운동이 더 뭉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라지 시장과 오성운동 수뇌부의 중재 역할을 자임한 그릴로 고문은 또 이날 밤 로마 인근 해변 네투노에서 열린 당 집회에서 "라지 시장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는 이를 감독할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라지 시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는 라지 시장이 이번 일로 수족이 다 잘리며 치명상을 입을 경우 시장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향후 시정 운영의 동력이 급격히 상실될 것을 우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그릴로 고문은 8일에는 "라지 시장의 처지는 1968년 미국 미시시피에서 당선된 첫 흑인시장의 처지와 같다"고 말하며 라지 시장이 기득권에 물든 기존 정당 위주의 정치 질서와 언론 환경 속에서 유례가 없는 물리적·사적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르면 오는 11월 치러질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앞두고 오성운동의 최근 급부상에 위기감을 느껴온 집권 민주당은 로마시의 난맥상과 오성운동의 혼란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기존 정치 체계에 반기를 들며 2009년 창설한 오성운동은 수도 로마의 시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하고, 이를 기반으로 차기 총선에서 집권당이 되겠다는 청사진까지 품었으나 이번 사태로 경험 부족과 행정력 부재를 전국적으로 드러낸 셈이 됐기 때문이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라지 시장이 잘하면 로마의 인상도 좋아지는데 최근의 사태를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많은 거짓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꼬집었다.

안젤리노 알파노 내무장관도 "오성운동은 팀웍이 부족하고 정치에 있어 준비가 안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ykhyun1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