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전지·전쟁 피해국 돌며 평화·화해 메시지

생전퇴위 의향을 우회적으로 밝힌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중국을 포함해 50개국을 방문했지만, 한국 땅에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가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으로 고통받은 국가나 격전지를 돌며 희생자를 위령하고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한국 방문은 숙제로 남은 셈이다.

9일 요미우리(讀賣)신문에 따르면 아키히토 일왕은 즉위 후 미치코 왕비와 27개 국가를 공식 방문했고 즉위 전에 돌아본 곳을 합하면 일왕 부부가 공식 방문한 국가는 50개국에 달한다.

즉위 후 2년 8개월여만인 1991년 9월 이뤄진 첫 공식 해외 순방 때는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태국 방콕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불행한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도록 평화국가로서 살겠다"고 말했다.

1992년에는 일왕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우리나라가 중국 국민에 대해 크고 많은 고난을 안겨준 불행한 한 시기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아주 슬프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작년 1월에는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인 팔라우를 찾아가 전쟁 희생자를 추모했다.

또 올해 1월에는 필리핀을 처음 방문해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전투로 많은 필리핀 국민이 희생된 것을 거론하며 이를 "일본인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밝혔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5년 사이판을 방문했을 때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에 가서 묵념했다.

그간의 행보에 비춰본다면 아키히토 일왕이 한국에 온다면 식민지 지배에 관한 언급을 할 것이 기대되지만, 아직 방문 자체가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4년 전에 쓰루오카 고지(鶴岡公二) 당시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에게 "언젠가 우리(일왕과 왕비)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일본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한일 관계가 순탄치 못했고 일왕이 한국에서 내놓을 메시지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가 상당한 가운데 한국 방문은 당사자의 의지만으로 실현되기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2012년 8월 14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독립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진 후 일본 사회 전체가 격하게 반발하는 등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일왕이나 식민지 지배에 관한 인식차가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