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의회의 거부권 가능성도
EU와의 협상에도 변수로 작용…"이론상 문제없지만 정치부담 너무 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을 후회하는 이른바 리그렉시트(Regrexit)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영국 보수당 내각에서도 재투표 가능성을 시사하는 주장이 나오면서 브렉시트 국민투표 재투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관심이다.

재투표 또는 브렉시트 무력화 방안은 영국과 EU가 진행할 협상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영국 여론과 정치권의 향배가 주목된다.

영국 정치권의 브렉시트 진영이 당초 약속한 공약에 대한 말바꾸기를 계속하면서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 것도 영향이 있을 전망이다.

◇ 법적으론 가능…英정부, 리스본조약 50조 발동 여부 관건
27일(현지시간) 영국 언론과 미국 CNN 등에 따르면 재투표에 법적인 장애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현행법상 23일 치러진 국민투표 자체에 법적 구속력은 없다.

EU에 탈퇴 의사를 통보하고 탈퇴 협상을 개시할 권한은 국민투표 결과 자체가 아니라 영국 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탈퇴 협상을 결정할 리스본조약 50조는 영국 정부가 발동을 선언해야 하며, 그 선언을 기점으로 협상이 개시돼 2년이 되면 자동 탈퇴가 된다.

실제로 1992년 덴마크가 국민투표에서 EU의 기초가 된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부결했다가 재협상을 거쳐 이듬해 2차 투표에서 통과시켰고 아일랜드도 2001년 EU 제도를 간편화하는 니스 조약을 국민투표에서 부결했다가 재투표에서 통과한 전례가 있다.

케네스 암스트롱 영국 케임브리지대 유럽법학 교수는 CNN에 "국민투표가 그 자체로 브렉시트를 촉발하지는 않는다"며 "여전히 정부의 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NYT)도 이날 '브렉시트에서 벗어나는 법'이라는 기사에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영국 정부나 의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출구 전략'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정부나 의회가 움직이지 않으면 브렉시트 자체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잔류 진영을 이끈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뿐만 아니라 유력한 후임자인 테리사 메이 내무장관과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도 "매우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상황이지만 의회가 명분 없이 버틸 경우 탈퇴론자의 반발이 거세질 수 있다.

◇ EU와 탈퇴조건을 우선 협상한 뒤 국민투표 실시 방안
투표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이에 승복하지 않고 국민에 똑같은 것을 되물을 명분은 약하기 때문에 다른 형식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재투표를 유도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이런 방법은 집권 보수당 내각 내부에서 나왔다.

제러미 헌트 보건장관은 27일 텔레그래프 기고에서 "국민은 EU를 떠나라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떠나는 조건에 대해서 투표한 것은 아니다"라며 탈퇴조건을 다시 협상해 국민투표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는 "탈퇴를 위한 리스본조약 50조를 곧바로 발동해서는 안 된다"며 "(리스본조약 50조 발동을 시점으로) 시계가 재깍거리기 전에, 우선 EU와 협상을 한 후 그 결과를 영국민 앞에 국민투표 또는 총선 공약의 형식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헌트 장관이 기고한 텔레그래프는 브렉시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매체다.

텔레그래프는 이런 헌트 장관의 발언이 브렉시트 지지자들로부터 투표 결과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잔류를 지지하는 매체인 인디펜던트 역시 28일 칼럼을 통해 "지난주 우리는 잔류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지만, 이는 대안 청사진에 투표한 것은 아니었다"며 "EU 지도자들의 양보안이나, 영국이 협상하는 명확한 탈퇴조건에 대한 두 번째 국민투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NYT는 재투표를 한다고 다른 결과 나올 것이라는 믿음에는 근거가 거의 없다고 봤다.

영국인들은 SNS 등을 통해 EU를 떠나는 것에 후회한다는 의견을 많이 올렸지만, 지난 25일 실시된 콤레스 여론 조사에서는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유권자 중 1%만이 투표 결과에 실망했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 총선 공약에 넣어 대리전…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의회 '거부권' 가능성
헌트 장관이 국민투표와 함께 대안으로 제시한 것처럼 영국이 총선을 통해 브렉시트 대리전을 치를 가능성도 제기된다.

EU와 탈퇴조건 등을 협상한 결과를 반영한 공약을 내놓고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음으로써 브렉시트 투표 결과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방안이다.

캐머런 총리의 후임은 총선 없이 선출이 가능하지만 영국 정치권이 전대미문의 혼란에 빠진 만큼 새 정부에 나라를 이끌 힘을 실어줄 총선이 필요하다는 데 여론이 모일 수 있다.

인디펜던트도 "투표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정당한 길은 총선에서 그렇게 할 권한을 얻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자유민주당에서 이미 그런 공약을 내놓았지만, 노동당에서도 그와 함께해야 실질적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며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그렇게 할 리는 없으니 새로운 지도부 아래에서 그래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이번 투표에서 잔류를 지지한 스코틀랜드(잔류 55.3%)나 북아일랜드(56%)가 독립 요구 목소리를 다시 높일 수 있다는 점도 재투표 가능성에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들 지역의 의회가 브렉시트 투표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국 상원은 지난 4월 보고서에서 EU 탈퇴는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NYT는 스코틀랜드가 브렉시트를 원치 않는 영국 지도자들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될 수 있다면서, 영국 차기 총리는 국민투표 결과대로 브렉시트를 이행하고자 했으나 스코틀랜드의 반대로 불가능하다고 영국인들에게 말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실적 성사 가능성은 불투명
이밖에 NYT는 영국이 EU 회원국은 아니지만 EU와 시장을 공유하고 국경을 개방한 노르웨이식 모델을 채택하는 방안도 출구 전략 중 하나로 제시했다.

한마디로 이름만 '브렉시트'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모두 이론적으로 가능한 상황에 대한 관측일 뿐, 현실적으로 재투표가 쉽게 성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 정부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EU의 주도적인 회원국들과 지도부는 영국과의 재협상이 없다고 못 박아 브렉시트를 기정사실로 했다.

국민 72% 이상이 투표해 52%인 1천700만 명 이상이 찬성한 안을 뒤집으려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데 영국 정부가 그런 부담을 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NYT는 영국 정부가 이번 국민투표 결과를 무시할 경우 브렉시트에 찬성한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 등을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투표 전부터 이번 투표가 이 사안을 결정짓는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던 캐머런 총리는 27일 의회에 출석해서도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의문은 있을 수 없다.

결정은 수용돼야만 한다는 데 내각이 동의했다"고 밝혔다.

브렉시트와 관련한 공약을 제시하는 총선으로 국민투표와 같은 대체효과를 기대하는 방안도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영국 선거 전문가인 존 커티스 스트래스클라이드대 정치학 교수는 노동당이 총선을 '브렉시트 대리전'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는지가 관건이라며 "많은 노동당 지지 유권자들이 탈퇴 표를 던진 것을 고려해보면 노동당에는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의구심을 표시했다.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김지연 기자 president2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