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마친 유권자 "내일 이후 어떤 일 일어날 지 모르겠다"
정치불신 키운 국민투표…정치권 신뢰 '바닥'

"매번 선거가 끝나면 정치권은 그때뿐이었다.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이번 국민투표도 정치절차일 뿐이다."

23일 오전 런던 남부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설치된 '영국 제38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온 다니 씨(50)는 이번 투표 결과로 생활이 달라질 것 같은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느 정당이든 정치인들은 투표가 끝나고 나면 자신들이 했던 얘기들에 대해 '노(No)' '노(No)'라는 말만 했다"고 한 뒤 자신의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투표를 꼭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는 그는 이번에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부인과 함께 투표를 하고 나온 존 씨(77)는 '내일 아침에는 절반은 기뻐하고 절망은 실망할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나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1975년 EEC(유럽경제공동체·EU 전신) 국민투표 당시를 들려줬다.

영국은 1973년 EEC에 가입하고 2년 뒤 EEC 국민투표를 벌였다.

당시에 그는 탈퇴 운동을 벌였다면서 보수당과 노동당 이외에도 몇몇 정당들이 있었고 일부 보수당 의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정치인이 영국이 바라는 것들이 이뤄질 것이라며 가입 유세를 벌였다고 한다.

그는 "(EU에 남았는데) 좋아진 것들이 없다"며 "캐머런(총리)이나 코빈(노동당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국론이 분열됐다는 목소리가 많다는 지적에 "정치인들이 늘 과장해서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날 시민들은 전날밤 쏟아진 폭우가 그친 뒤 흐린 날씨에 자못 진지한 표정들로 투표소를 찾았다.

부부가 함께 투표소를 찾은 이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별다른 대화 없이 투표소 안으로 곧장 향했다.

90세 남짓한 한 할머니는 자동차에서 내린 뒤 지팡이에 의지해 무척 힘든 걸음으로 20미터 가량 떨어진 투표소로 들어가 소중한 한 표를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투표소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이 많은 탓인지 임시 주차장에는 투표하러 온 유권자들의 차들로 가득했다.

투표율은 투표 결과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혀진 요소다.

투표소 안은 고요했다.

한층 달아올랐던 여론전 속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을 진지하게 투표용지에 담는 듯 했다.

EU 탈퇴 여부를 놓고 펼쳐진 이번 국민투표를 앞두고 영국 정치권은 찬반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한 여론전을 벌였다.

남아야 하는 이유와 떠나야 하는 이유를 강조하면서 상대 측 주장들을 반박하는 양상이 계속된 여론전이었다.

'거짓말' '겁박' '공포 프로젝트' '혐오 프로젝트' 등의 단어들이 양측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믿지 않았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지난 16~17일 벌인 조사에서 'EU 회원국 지위와 관련한 말을 얼마나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캐머런 총리의 말에 신뢰한다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72%가 '매우 많이' 또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EU 탈퇴 진영을 이끈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과 코빈 노동당 대표도 62~63%로부터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수를 받았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운 국민투표가 된 것이다.

이런 불신에 이어 국론 분열을 일으킨 비난의 화살이 정치권을 향했다.

유고브 조사 결과 이번 국민투표의 영향이 '분열적이었다'는 평가가 57%에 달했다.

단합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는 6%에 불과했다.

대중지 데일리 미러는 "가장 분열을 초래하고 비열하며 불쾌한 정치 캠페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30대 초등학교 직원인 데이비 씨(여)도 분열적인 국민투표에 대해 "찬반 양쪽에서 과장들을 쓰기 때문"이라며 "정치인들은 항상 과장을 말한다"고 지적했다.

회사원 톰 씨(31)는 국민투표로 갈등이 커지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번 투표는 곧 분위기가 누그러드는 다른 선거들과 성격이 좀 다른 것 같다"면서 "글쎄요.

내일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했다.

투표 결과가 EU 잔류든 탈퇴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결과를 접한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불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투표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원치 않는 변화를 맞게 된다면 불신이 분노로 변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2기 내각 1년이 막 지난 여당 보수당이나 야당인 노동당에나 이번 국민투표는 세계에 번지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염증' 물결을 영국에 앞당길 수 있는 정치 일정이 될 수 있을 듯싶다.

(런던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jungw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