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노믹스에 각 세운 라잔, 결국 연임 포기
‘스타 경제학자’ 출신으로 인도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RBI) 총재가 연임을 포기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외신들은 사실상 정치적 압력으로 중도 사퇴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20년 만에 연임 못 한 중앙은행 총재

라잔 총재는 18일(현지시간) 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정부와 협의 후 심사숙고한 끝에 오는 9월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이 전했다. 지난 20년간 RBI 총재의 임기는 예외 없이 첫 3년 후 2년간 연장된 점을 감안해보면 경질된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낸 그는 2013년 9월 미국 시카고대 교수로 재직 중 만모한 싱 정부에 의해 RBI 총재로 발탁됐다. FT는 해외 투자자들이 그를 인도 루피화의 추락을 막아내고, 물가상승률을 떨어뜨리면서 인도 금융시장을 안정시킨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라잔 총재도 물가를 낮추고, 루피화를 안정시켰으며 부실채권을 줄인 것을 성과로 꼽았다.

취임 전 두 자릿수를 기록하던 인도의 물가상승률은 지난 4월 5.4%로 떨어졌다. 올 1분기 성장률이 7.9%를 기록하면서 중국을 제친 것도 라잔 총재의 안정적인 통화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외신은 라잔 총재가 이룬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연임을 포기한 배경으로 정부와의 잦은 마찰을 원인으로 꼽았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빠른 성장을 위해 금리 인하를 강하게 압박했지만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리는 데 집중한 라잔 총재가 이를 거부하면서 충돌했다.

이 때문에 집권 인도국민당(BJP) 내부에선 최근 라잔의 ‘제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 출신인 수브라마니안 스와미 상원의원은 “라잔 총재의 고금리 정책이 인도 경제를 손상하고 있다”며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점이 빠를수록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라잔 총재가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거론하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인도인이 아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FT는 모디 총리도 라잔 총재에 지지를 보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에 대한 ‘공격’을 묵인했다고 전했다. 아룬 자이틀레이 재무부 장관은 이날 “정부는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조만간 후임이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커지는 사퇴 반대여론

외신은 라잔 총재의 전격 사퇴가 가뜩이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가능성으로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인도 경제를 더욱 불안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FT는 인도 금융전문가의 말을 인용, “후임자로 누가 임명되더라도 라잔 총재에 걸맞은 신뢰성을 갖췄는지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외신은 라잔 총재의 사임을 그의 영문 이름 첫 글자를 딴 ‘렉시트’로 표현하며 브렉시트와 비교해 인도 금융시장에 충격이 예상된다고 전했다. 아르빈드 마야람 전 재무부 차관은 현지 언론에 “라잔 총재의 퇴임으로 인도 경제가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출신으로 198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경제학자를 잃었다”며 “중앙은행이 완전히 독립된 기관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의 퇴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인도 온라인 청원단체 ‘체인지’에는 “라잔을 붙잡아야 한다”는 지지자들의 요구가 6만건 가까이 올라왔다. 인도 재계도 우려를 보였다. 아난드 마힌드라 마힌드라그룹 회장은 트위터에 라잔 총재가 인도의 국제 신인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공동창업자는 “라잔과 같은 탁월한 이코노미스트가 있다는 것은 인도의 행운이었다”고 지지를 표했다.

일부에서는 라잔 총재가 집권당에 대한 직접적 비판으로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는 5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서 인도 경제를 ‘장님 나라의 외눈박이 왕’에 비유해 모디 정부의 성과를 깎아내린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