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재수 끝에 최고령 당선…총리·재무장관 등 역임해 경험 풍부

5일(현지시간) 치러진 페루 대선 결선투표에서 초박빙의 승부 끝에 당선된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77) '변화를 위한 페루인 당' 후보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경제 전문가' 출신 정치인이다.

세계은행(WB) 등 국제 금융기구에 일하면서 실무 감각을 키웠고 페루에서 수차례 경제 각료 등을 역임하면서 폭넓은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 때문에 쿠친스키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페루의 경제 성장을 이끌 적임자로 평가받았다.

쿠친스키는 온건한 자유시장주의자로 중산층과 도심 지역에서 지지기반이 탄탄하다.

그는 무역과 투자를 통한 경제 성장 정책을 표방한 친(親) 기업·시장주의자다.

대선 공약으로 소비와 투자 진작을 위한 세금 감면과 고용률 제고,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 등을 내걸었다.

쿠친스키는 1차 대선투표 운동 기간에 게이코 후지모리 민중권력당 후보의 독주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차 투표를 앞두고 지지도가 급상승하던 좌파 성향 후보를 누르고 2위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페루 역대 최고령 대통령인 쿠친스키는 두 번만의 도전 끝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20011년에도 4개 정당 연합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지만 1차 투표에서 3위에 그쳐 결선투표 진출이 좌절되기도 했다.

당시엔 결선투표에 진출한 후지모리를 지지하기도 했다.

쿠친스키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경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재무통'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정치·철학을 전공한 그는 1961년 미국 프린스턴대의 우드로 윌슨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은행에서 중앙아메리카 6개국과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을 담당하는 경제학자로 활동했다.

30세인 1966년에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대통령 정부의 경제 자문역을 맡으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페루 중앙은행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1968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안벨라스코 알바레도 군사 정권 시절 정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마그마 쿠퍼, 도요타, 크레디트스위스 등 민간 기업은 물론 월가 국제투자은행에서 일하면서 역량을 발휘했다.

테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1980년 페루로 돌아온 쿠친스키는 2000년 초중반까지 에너지부 장관, 재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예비 대통령으로서 자질을 쌓았다.

알레한드로 톨레도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인 2005년 8월 총리에 발탁되기도 했다.

쿠친스키가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페루인의 보통 삶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는 점은 풀어야 할 숙제다.

유럽 이민자 가정에서 유복한 삶을 누린 쿠친스키는 저소득층으로부터 낮은 지지를 받고 있고 미국 시민권이 있다는 점에서 이중국적 논란도 있다.

페루 아마존 지역에서 나환자를 치료한 폴란드계 독일 의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쿠친스키는 가끔 페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칠 정도로 플루트와 피아노에 대한 조예가 깊다.

그는 전설적인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사촌이다.

두 번 결혼한 경험이 있는 그는 첫 번째 결혼 생활에서 얻은 자녀들은 물론 현재 부인인 낸시 랭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도 기르고 있다.

쿠친스키는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랭을 만났으며 두 사람은 마이애미에서 사모펀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랭은 헐리우드 배우 제시카 랭의 사촌이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penpia2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