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에 안 휘둘려" vs "자본주의 대안 첫발"
재정·복지 우려 등 현실론 완승…"4분의1 찬성 주목해야" 의견도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한다는 스위스의 기본소득 법안이 5일(현지시간) 부결된 뒤 찬성, 반대 진영에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스위스 국민이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경제를 선택했다는 시각과 함께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대안이 첫발을 떼는 데 성공했다는 지지층의 평가도 나온다.

7일 스위스 언론들은 26개 주 모두 압도적으로 반대표가 높게 나오자 유권자들이 정부와 의회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를 했다.

스위스 유력지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은 "국민이 의회의 결정을 따랐다"고 분석했다.

스위스 정부는 국민투표 전 월 2천500스위스프랑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연간 2천80억 스위스프랑(약 250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의회 하원 투표에서도 반대 157, 찬성 19로 부결됐다.

애초 헌법 개정안으로 투표에 부쳐진 기본소득 법안에는 논란이 된 월 2천500스위스프랑(한화 300만원)이라는 구체적인 액수가 담겨있지 않다.

'기본소득' 제정으로 투표에 넘겨진 이 안은 '연방정부는 조건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한다'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에게 존엄한 삶과 공동체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법률로 기본소득과 재정방안을 마련한다'는 3개 항으로 돼 있다.

월 2천500스위스프랑은 이 법안을 처음 발의한 단체에서 월 최저생계비(2천219프랑)를 근거로 추정한 금액이다.

다분히 캠페인 때 관심을 불러오려는 목적도 있었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2013년 10월 12만6천 명의 서명을 얻어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성사시킨 지식인 단체는 캠페인을 하면서도 "기본소득 실현에는 몇 년이 걸릴 것이다"라며 법안 통과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체 바그너 대변인은 76.9%가 반대했다는 투표 결과가 나오자 "4분의 1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일자리가 줄어들면 기본소득에 대한 욕구가 커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목소리도 있다.

장 자크 왈츠 씨는 "기술의 발달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회가 온다면 기본소득을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투표에서 기권했다.

다만 재정, 세금 문제에 대한 대안 없이는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국민을 설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원로정치학자 클로드 롱샹은 스위스 관영매체 스위스인포에 "법안 발의자들은 재원 조달과 관련해 납득할만한 방안을 내놓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했다"고 말했다.

스위스 유권자들은 연금을 줄이고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데다 기존 복지 혜택을 없앨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의 손을 들어줬다.

스위스의 실업률은 3.5%로 유럽연합(EU)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

그만큼 사회가 안정돼 있고, 젊었을 때 일하고 세금을 내면 연금으로 노후가 보장되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애초 당장은 기본소득 법안 자체가 심각하게 논의될 필요가 없는 사회 구조를 갖고 있다.

알렝 베르세 스위스 내무장관은 투표 후 "현 경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우리 시스템은 잘 운영되고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산업 디자이너인 퀴르댕 피로비노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새로운 세대가 어디서 어떻게 일자리를 찾을지 고민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 법안은 난센스"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받는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에서는 '전 국민'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논란을 일으킨 국민투표는 종결됐지만, 핀란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는 차분하게 부분 기본소득제 등 변형된 기본소득이 논의되고 있다.

영국과 뉴질랜드도 비슷한 안을 구상하고 있어 스위스발 기본소득 논란은 당분간 유럽을 중심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제네바연합뉴스) 이광철 특파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