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공화당 대통령선거 후보 지명을 앞두고 공화당 지도부와 트럼프가 대선 공약 노선에 대해 정면충돌하고 있다. 공화당 주류 일각에서는 보수 가치를 위해 트럼프를 배제하고 제3당 창당을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창당 162년 만에 공화당이 대선을 앞두고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트럼프-공화 지도부 노선갈등 폭발

폴 라이언 하원의장
폴 라이언 하원의장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5일(현지시간) CNN방송에 출연, “트럼프를 현재로서는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이언 의장은 오는 11월 있을 대선을 지원하는 공화당 전국위원회(RNC)를 이끄는 당 내 선출직 최고위 당원이다. 그는 이 방송에서 “공화당은 표준적 (보수) 가치를 지닌 표준적 후보를 원한다”며 “트럼프가 공화당의 핵심 가치, 즉 작은 정부와 헌법을 존중하는 최고권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3일 인디애나주 경선 승리로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트럼프의 지지 문제를 놓고 라이언 의장이 고심해왔다고 보도했다. 작은 정부와 자유무역 옹호, 동맹관계, 낙태 등의 주요 이슈에서 공화당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트럼프를 당 대선 후보로 받아들여야 할지,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정책을 수정해야 할지 고민했다는 설명이다.

워싱턴 소식통은 “라이언의 발언은 ‘공화당이 바뀔 수 없으니 트럼프가 대선 공약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트럼프는 인터뷰 내용을 전해 듣고 바로 “당 주류가 나를 불공평하게 대한다”며 “나도 라이언의 아젠다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맞받아쳤다. 자신이 공약으로 내세운 복지 확대, 부자증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동맹관계 재검토 등 일련의 이슈를 밀고 나가겠다는 통보다.

부시 전 대통령도 지지 거부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vs 1인자' 정면충돌
공화당 전직 대통령과 과거 대선 후보자들도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유보하거나 거부하는 등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와 43대 대통령인 아들 조지 부시가 모두 트럼프 지지선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인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오는 7월 전당대회 불참을 통보했다. 2008년 대선 주자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도 “(트럼프 때문에) 이번 선거는 정말로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며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 언론은 공화당 주류를 이끌어야 하는 라이언 의장으로서는 당분간 트럼프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곧바로 지지선언을 한다면 폭발 직전인 당내 주류 분위기에 기름을 붓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WP는 5일자 칼럼에서 “작은 정부, 시장경제 등 보수적인 가치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며 “제3당 창당과 제3후보 옹립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 지도부가 당 대선후보를 지지선언하지 않은 적은 없다. 1896년 공화당 소속 하원의장인 토머스 리드가 윌리엄 매킨리와 경선에서 맞붙었다가 패했지만 지지를 선언했다.

1964년에도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한 극단적 보수주의 성향의 배리 골드워터가 지도부의 공식 지지를 받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려야 했지만 결국 지지를 얻어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트럼프 리얼리티(reality)’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설사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공화당은 보수적 가치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며 “트럼프가 이기든 지든 라이언 하원의장이 당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더 큰 부담을 안게 됐다”고 전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